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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안녕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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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 Jan 30. 2023

쌀포대를 깔끔하게 뜯던 당신.

마흔다섯_ 잊을 수가 없어요.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밖에서는 유난히 꼼꼼하다 얘길 듣는 나에게 실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이제는 함께 산 지 십 년이 넘다 보니 남편만이 그 단점을 제대로 알고 있는데, 다름 아닌 뚜껑 닫기, 포장 뜯기 같은 작업들을 잘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뚜껑을 돌려서 채워야 하는, 소스통 같은 것은 제대로 닫지 못해 다음번 사용 때 뚜껑이 열리지 않아 애를 먹거나, 뚜껑을 제대로 닫지 못한 병을 들어 올리다 왈칵 쏟아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으이그~ 어쩜 그러냐~" 하면서도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곤 한다. 마치 나의 실수가 반갑다는 마냥.  

 "완벽해 보이는 너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는 걸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는 알지." 언젠가 이와 비슷한 말을 하며 씨익 웃던 남편의 얼굴을 나는 기억한다. 어이구. 좋기도 하겠다. 마누라가 실수하는 게 그렇게 좋으냣.


 어쨌거나 그런 나에게, 쌀 포대 같은 것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쌀 포대에 둘러있는 실을 잡아당겨 깔끔하게 뜯어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깔끔하게 쌀포대 뜯는 방법을 검색해 본 적도 있다. 첫 실의 매듭을 살살 풀어 한번, 두 번 풀어낸 다음 촥~ 잡아당기면 후드득 하고 잘도 풀리던데, 내가 하면 왜 그리 실이 풀리다 말고 죄다 엉켜 버리는 건지. 우리에게 '가위'라는 도구가 있어 얼마나 다행이던가.


 쌀 포대를 뜯다가 실이 엉켜버릴 때면 친정아버지가 떠오르곤 했다. 무엇이든 야무지게 일을 해내던 아버지가 말이다. 쌀포대 뜯는 건 일도 아니었지. 아버지는 두툼한 손가락으로 잘 집어지지도 않는 쌀 포대의 실을 두어 번  잡아보다 안되면 엄지 손가락에 침을 척! 발라 실을 탁! 잡으셨다. 그리곤 이내 실을 어찌어찌 당겨 후드득~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풀어내셨다. 그 모습은 사내 다웠고, 멋졌다. 어쩜 그리 아버지가 하면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전문가처럼 느껴지던지.... 아무리 남편이 아버지와 똑같이 실을 잘 풀어 후드득 포대를 열어 보여도 아버지 손에서 뜯겨 나가던 그것만큼 시원하고 깔끔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나에게 언제나 다부지고, 맥가이버의 칼처럼  만능인 분으로 기억된다.


 오늘 정말 오랜만에 쌀 포대를, 가위 없이 실을 살살 풀어 뜯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후드득' 소리와 함께 깔끔하게 쌀포대를 오픈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아버지가 떠 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쌀 포대를 깔끔하게 뜯었다고, 눈물이 핑 돌았다. 쌀 포대 하나도 예술적으로 깔끔하게 뜯어내던 당신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오버야 이건.


 내 감정에 나도 놀라 후딱 옷소매로 눈물을 휙. 닦았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일 년이 훨씬 지났지만 우리 가족은 여전히 사무치게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누구 하나도 아버지 얘길 먼저 꺼내면 눈물바다가 될 것 같아서, 서로 딴청을 피우며 각자 이겨내기 바빴다. 그런데 설 연휴 전부터 아버지 생각에 참 많이 슬프더니... 이유도 모르게 눈물이 자꾸 쏟아지곤 했다.  누구는 나에게 우울증이 온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이야길 해 보니 언니도 엄마도... 나와 같았던 게, 각자 슬픔을 참는 것에 한계를 느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각자의 방식으로 참아내던 우리는 더 이상 그 슬픔을 참아내지 못하여 함께 모여 울어버렸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그것마저도 아버지에게 유산처럼 받은 우리는, 서로를 너무 배려하여, 슬픔을 꾹꾹 눌러 혼자 이겨 내 보려다 그만 다들 병이 들어버렸다.

 그래도 너무 울면. 홀로 견뎌야 하는 엄마의 밤이 너무 힘들어질까 봐 마음껏 슬퍼하진 못했지만. 어쨌거나 우리에게 이번 설날은 슬프고, 슬프고, 슬펐던 시간이었다.


 나, 쌀포대를 실 한번 엉키지 않고 단번에 풀어냈어!


마흔다섯의 어른아이는 다음번 아버지 납골당에 가면, 자랑할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쌀 포대 하나도 예술적으로 깔끔하게 뜯어내던 당신이 생각났다 말해야겠다고. 나는 정말 여전히 믿을 수가 없다고. 정말. 많이. 보고 싶다고. 그냥 펑펑 좀 울어버려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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