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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안녕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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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 Dec 21. 2022

겨울의 추억

마흔넷_아빠의 선물을 기억하며.

 유난히 가난했던 겨울의 우리 집은 웃풍이 세서 이불을 코 끝까지 끌어당겨야 잠을 잘 수 있었다. 기와집도 아닌 것이 흙집에 기와 모양의 지붕을 얹은, 초가와 기와의 콜라보쯤 되는 그런 오래된 집이었다. 그 시절 언니와 내가 쓰던 방은 나무 장작으로 아궁이에 불을 때야 했다. 부지런한 아버지 덕분에 겨울 방안은 장판이 녹아내릴 정도로 뜨끈뜨끈했다.

 가끔 아버지는 아궁이에 쪽마늘을 통째 휙 던져 넣어 구워내곤 하셨는데, 어린 나는 마늘이 알싸하다고만 생각해서 아버지가 검댕이 묻은  손으로 까 주는 구운 마늘을 한 입도 입에 넣지 않았다.

구수하고 얼마나 맛있는데~

 농담을 잘하시던 아버지가, 매운 마늘을 나에게 먹이려고 일부러 맛있다고 하시는 줄 알았다. (어른이 되고 보니, 그 맛을 알겠다. 지금은 고기를 구울 때_나는 채식주의자라 굽기만 한다_ 마늘부터 구워서 남들이 고기를 먹을 때, 나는 마늘을 먹는다. 그렇게 달고 구수할 수가 없다. )

 

 겨울에는 목욕하는 것도 일이었다. 안방과 연결된 부엌 아궁이에 엄마가 '곰 솥'이라 부르던 커다란 솥을 얹혀서 물을 한가득 끓여 내면, 빨간색 큰 고무 다라이에 찬물을 절반 받고, 데워진 물을 부어 씻기 알맞은 온도로 맞추어야 했다.

 지금도 빨간색 플라스틱의 박 모양 바가지가 기억에 또렷한데, 바가지로 뜨거운 물을 떠서 찬물에 섞는 동안, 부엌의 차가운 윗 공기 때문에 벌거벗은 몸에 소름이 돋곤 했다.

 여기저기 살이 터서 쩍쩍 갈라진 틈으로 목욕물이 닿으면 화들짝 놀라기도 했고. 한바탕 추위와 싸우며 요란한 샤워가 끝나면 후다닥 옷을 입고, 아버지가 따뜻하게 데워놓은 방으로 달려갔다.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이불을 덮고 앉아 귤을 까먹으면 노곤 노곤하니, 배가 부르면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귤귀신이었던 나는 손이 노래지도록 귤을 먹고 또 먹었다.


 그러다 배가 아파오면 참 난감했다. 야외에 있는 푸세식 화장실로 가는 것도 귀찮거니와  추위에 맞서 허연 엉덩이를 까고 앉아 힘을 주고 있노라면 기껏 데워놓은 몸이 순식간에 식어버려 오돌오돌 떨리곤 했다. 호~ 하고 입김을 불면서 볼일을 보고 나면 찬물에 손을 씻는 일이 또 곤욕이었다.


  야식을 즐기시던 아버지는, 겨울밤에 꼭 한 번씩은 장독에서 동치미를 꺼내다가 삶은 토란과 함께 드시곤 했다. 살얼음이 동동 떠 있는 동치미가 보기만 해도 추워서 언니와 나는 이불속에서 나오질 않았다. 느끼한 토란도 입에 맞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우리에게 한 입 먹이고 싶어 갖은 맛있는 표정을 지으며 먹어보라고 우리를 유혹하셨었다.

출처: https://blog.naver.com/laon365/20190502180

 겨울에 손꼽아 기다리던 날은 바로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그날은 꼭 일찍 잠들었다. 산타 할아버지가 주는 선물인지 아빠가 주는 선물인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선물 받는 게 좋았다.

 아버지는 꼭 우리의 머리 위에 선물을 올려두곤 하셨는데, 과자가 들어가 있는 빨간색 플라스틱 장화모양의 선물세트나, 연필 한 타스가 대부분이었다.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 머리 위에 올려진 선물을 확인하면, 내복 바람으로 선물을 뜯으면서 좋아 비실 비실 웃었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로맨티스트인 아버지 덕분에 낭만이 있는 겨울을 보내었다.


 장판이 눌어붙어 초콜릿 색으로 변할 만큼, 우리를 따뜻하게 해 주시려고 아버지는 겨울 낮밤을 얼마나 애쓰셨을까? 아버지가 구워주신 그 마늘은 또 얼마나 맛있었을지. 아버지와 함께 먹는 토란은? 동김치는? 얼마나 기가 막힌 맛이었을까. 어른이 되고 보니 그 세상 맛있었을 음식들을 마다한 어린 날의 내가 좀 후회가 된다. 그리고 나에게 이런 겨울날의 따뜻한 추억을 선물해 준 아버지가 고맙고, 그립다.

 오늘은 전기장판 따뜻하게 틀고 이불을 덮고 앉아 손이 노오래질 때까지 귤이나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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