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던 세계, 연예계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나와 부딪혔던 여자가 들어왔다.
대표는 그녀를 지망생이라 불렀다.
"넌 네 몸이 계약서인데, 이 자리 오면서 계약서도 안 들고 왔나?"
파티룸 안, 회장이 그녀에게 던진 말이었다.
"회사도 없이, 실장 소개로 여기까지 왔으면 네 가치는 네가 증명해야지. 너 같은 애들이 한둘인 줄 알아? 뭘 믿고 널 꽂아달라는 거야."
그녀를 중심으로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회장 옆자리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연습생 시절을 함께 했던 사람. 데뷔 후에는 화면 속 얼굴로 서로의 안부를 대신하던, 전 남자친구. 그의 눈이 흔들렸다. 이곳에서 마주칠 거라곤 그 역시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이 다시 열렸다.
"회장님~"
요즘 가장 잘나가는 우리 회사 선배였다.
"스케줄 가기 전에 인사드리려고요. 오늘 의상 어때요? 예쁘죠?"
선배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깐 멈칫하더니 윙크 하나를 남기고 지나갔다. 그녀는 상석까지 파고들어 회장 옆에 앉아 러브샷을 나눴다.
익숙한 얼굴들의 낯선 배치.
이윽고 선배가 자리를 떴고, 회장의 시선이 내 쪽으로 옮겨왔다.
앞에 비어 있던 잔이 채워졌다.
나는 잔을 들지 않았다.
그러자 술이 멈추지 않고 따라졌다. 넘치는 술이 테이블을 타고 흘렀다.
"회장님, 제가 받겠습니다."
전 남자친구가 앞에 나섰다. 회장은 잠시 얼굴을 구기더니 옷깃을 고쳐 세웠다.
"자존심 같은 건 다 팔아야 이름 석자 이 바닥에 남기는 거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가 곧바로 뒤따라 나왔다.
"그냥 술자리 인사잖아. 분위기만 좀 맞추면 되는 건데."
대표의 꽉 낀 셔츠 단추들이 주인의 욕심을 감당 못한 채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아까 네 선배는 얼마나 독한 줄 알아?"
그들이 말하는 '독하다'는 이 바닥에서 버티기 위한 말처럼 들렸다.
"너 크게 한방 안 뜨고 싶어?"
"네. 저 안 뜰래요.
안 뜨고, 이 바닥 뜰래요."
계단을 오르는 순간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그였다.
미처 챙기지 못한 가방과 캔커피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건물을 나섰다.
지하를 벗어나자 그제야 숨이 트였다.
사람 없는 골목. 아스팔트 위로 간판 불빛이 느리게 흘렀다.
"너, 이 바닥 안 어울린다니까."
"아직도 너너 거리네."
웃자, 그도 웃었다.
"아까 일부러 모르는 척했어."
"너 회사도 큰데... 저 회장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와야 해?"
그는 내 머리를 헝클이며 웃었다.
"누나, 오늘 보니까 좋다. 누나라고 했다. 됐지?"
"또 까분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는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잠깐 웃는 순간만큼은 각자가 가장 순수했던 때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차 왔다. 이러다 사진까지 찍히면 너네 대표 진짜 난리 난다."
차 문이 닫혔고, 그날의 시간도 함께 닫혔다.
그리고 그 세계의 문만큼은 쉽게 닫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