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출발점, 전혀 다른 결과,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다른 것은 그저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촉감으로 전해져 오는 차이는 천국과 지옥처럼 느껴졌다
얼마 전 어떤 신경정신과 의사가 쓴 '현명한 이기주의'라는 책을 완독 했다. 제목만 보면 닳고 닳은 처세술에 대한 책일 것이라 오해하기 쉽지만 (동의 여부를 떠나서) 작가의 확고한 인생관과 세계관이 담겨 있어서 놀라며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특히 저자는 의사임에도 사람들, 특히 정신과 의사들이 범죄나 이상 행동을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를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조금 의외였다. 프로이트부터 수많은 정신분석가들이 인간의 이상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심지어 본인도 신경정신과 의사임에도 말이다. 저자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일한 환경에서 자라고 교육받았음에도 한 사람은 선인, 다른 한 사람은 악인이 되는 사례를 전 세계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사회, 환경, 가정교육, 경제적 상황 등 많은 요인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반대되는 사례로 얼마든지 반박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선인과 악인은 그저 타고난 어떤 '기질'의 발현일 뿐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거의 모두가 동일한 공간에서 오랫동안 교육을 받음에도 언제 어디서나 엇나가는 사람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부정하고 인간은 모두 비슷하다고 가정하고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책을 만들기 때문에 결과는 언제나 실패인 것이다"
이미 말했지만 이런 저자의 생각에 온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책을 다 읽을 때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명절 즈음으로 사뒀던 사과를 바구니에 담아 상온에 보관 중이었는데, 2주 정도 지나자 어떤 사과는 외형에 전혀 변화가 없어서 바로 씻어서 먹을 수 있었고, 다른 사과는 완전히 물러지거나 말라비틀어져서 버리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분명히 같은 날, 같은 상자에서 꺼내서 같은 조건에 뒀는데 두 손가락으로 만져봤을 때 느껴지는 차이는 사람과 사과를 동시에 떠올리게 만들었다.
내가 사과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정답을 모를 수 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나는 한 박스의 사과 상자에 들어가는 사과는 그래도 비슷한 시기에 수확한 사과일 가능성(그래야 비슷한 품질의 사과를 가장 적은 노력으로 한 박스에 포장할 수 있을 테니)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사과를 재배하는 분들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사과 상자를 채우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런 가정은 앞에서 말한 선인과 악인의 차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경찰은 이러저러한 원인이 있다고 발표한다, 범인은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그랬다고 본인의 입으로 말한다. 하지만 경찰이나 범인이 말한 이유와 동일한 상황에 있음에도 살인을 하지 않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니, 더 많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럼 살인자와 비(非) 살인자의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한 것일까.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서 자란 두 사람이 보여주는 선택의 차이,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서 보관 중인 두 사과의 상태의 차이에 대해 우리는 오로지 '결과' 밖에 알지 못한다. 원인과 결과에서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결과'라는 과일에서 얼마만큼의 '원인' 향기를 추출할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전혀 알지 못한다고 원인을 찾는 일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과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인간이라는 존재와 타인과의 관계로 인해 더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선택이라는 행위로 표현되는 '인생'이라는 제목의 책을 단숨에 페이지 넘기듯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기를 스스로 간절히 바랄 뿐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혹은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속단'이라는 창으로 찌르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