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단둘이 있던 그 누군가를 함께 찾아줄 사람이 곁에 있을까
절박함과 간절함,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느껴지는 슬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의 수가 매해 늘고 있다는 뉴스 기사를 보지 않아도 아침저녁으로 반려동물과 함께 거리를 나선 사람들의 모습은 이제 일상 속 풍경의 한 장면이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한 사람과 한 동물(?)의 동행이거나 한 사람과 다수의 동물들이 함께 할 뿐이다. 적어도 내가 사는 동네 산책로에서 두 사람이서 동물 한 마리를 산책시키는 모습은 드물게 목격된다.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반려동물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의 숫자도 많아지고 있다. 매일 같은 출근길을 천천히 지나다가 보면 새로 붙여진 반려동물 실종 전단지가 촘촘히 붙여져 있다. AI의 시대라고 하니 포스트를 만드는 일은 AI가 해줄 수 있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전단지를 붙이는 것은 사람이 했을 텐데 누군가 발품을 팔아 붙인 전단지를 두 손가락으로 만져봤을 때 느껴지는 무언가는 잉크뿐만이 아니라 그 전단지를 붙이는 사람의 어떤 무겁고 힘든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었으면 요즘같이 모두가 개인정보를 지키는데 혈안인 시대에 선뜻 자기 전화번호를 불특정 다수에 공개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다행히 기술의 발달로 인해 반려동물의 위치를 GPS로 거의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발전된 기술로 말미암아 앞으로는 전단지를 붙이는 사람이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내가 반려동물과 단둘이 사는데 반려동물을 잃어버렸다면, 그런 절실한 순간에 나와 함께 시간을 내서 나의 소중한 반려동물을 찾아 줄 사람이 내 곁에 함께 하고 있을까.
사회생활을 할수록 사람이 싫어지고 혼자 있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삶을 택했지만 그런 선택의 결과 나는 아주 절실하고 실체적인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도 내 일처럼 나서줄 사람 한 명을 곁에 두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하는 것일까. 어차피 결혼해도, 자식이 있어도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라는 말도 있으니 그냥 어떤 일이든 나 혼자서 다 견뎌낼 수 있을 만큼 강한 모습으로 인생의 끝까지 이어나갈 수 있을까.
당연히 답이 있는 질문은 아니다. 하지만 답은 몰라도 내가 어떤 것을 원하고 있는지는 명확히 말할 수 있다. 나는 내가 함께하던 반려동물이 사라지만 나와 함께 기꺼이 전단지를 붙이며 내가 기르던 동물을 찾기 위해 발 벗고 나서줄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누군가를 고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만약 선택지가 있다면 나는 내가 아끼던 동물이 없어져서 경황이 없는 나 자신을 진정시켜 주고 위로해 주고 함께 해줄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듯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정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혼자서 삶을 견뎌낼 만큼 강하지 못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