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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트 아울 Nov 22. 2024

시간을 달리는 낙서들

애틋했던 연인들보다 더 멀어져 비린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이제는 사라져 버린,  다른 사람의 가장 좋았던 순간을 조금은 너그럽게 봐줄 수 있는 너그러움


이런저런 사정으로 멀리 갈 때는 자가용보다는 버스랑 지하철을 자주 이용한다. 당연히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지만 그래도 만족하면서 이용 중인데 언제나 눈에 띄는 것은 깨끗한 내부 상태이다. 벽이나 좌석 어디에도 낙서는 없고 파손된 좌석도 보이지 않는다. 가끔 보이는 지저분함은 오직 깨끗한 상태로 출발한 교통수단을 망칠 고의는 없었겠지만 더러움을 간직할 의지가 없었던 소수의 승객들의 무심한 기여 덕분이다.
그런데 오늘은 눈에 띄는 낙서 하나를 발견했다. 오랜만이라서 반가운 감정 하나, 요즘에도 이런 낙서를 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둘, 그리고 그 낙서에 적힌 시간에서 느껴지는 복잡함 셋. 뭐 이런 감정들이 순간적으로 스쳐깄지만, '시간'이라는 단어의 무거움은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이름 모를 연인이 사이좋게 버스를 탄다. 빈자리를 찾다 보니 마침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빈자리가 보인다. 자리에 앉아 웃음과 즐거움을 나누다가 갑자기 누군가 팬을 꺼낸다.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슬며시 주변을 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빈 앞 좌석을 바라본다. 누가 볼까 싶어 순식간에 이름과 시간만 적고 팬뚜껑을 급하게 닫는다. 그리고 서로를 마주 보며 씩~하고 웃는다. 그리고 내릴 장소에 도달하자 그들은 버스 안에 추억을 남겨두고 두 손을 잡은 상태로 하차한다.
그리고 1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버스 안의 유성펜은 시간의 흐름을 견뎌냈다. 하지만 그 유성펜의 주인들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고 있을까. 그건 모르겠다. 그리고 누군가 그 아래 다른 추억을 새겨 넣었다. 그 10년 사이에 강산은 변했고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황폐하게 변해버렸다. 순식간에 낙서를 하고 기억만 가지고 내리려는 연인의 영상을 찍어 유튜브나 인스타에 올려 망신을 주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누군가가 빅브라더를 대신하여 그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저 낙서를 한 사람들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져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저 낙서를 한 사람들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저 낙서를 보며 당시의 따뜻함과 약간의 애틋함, 그리고 세상의 부박함을 느낀다. 같은 것을 보면서 다른 것밖에 느끼지 못한다는 서글픔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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