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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깃줄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간절함, 떠나면 고생뿐이라는 두려움

by 나이트 아울
세상이 난리가 아니지만 적어도 나 한 사람만은 올 한 해를 무사히 마치고 있다. 세상에 몰아치는 풍파에 비하자면 오늘처 퇴근 직전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전화로 쌍욕을 듣는 일 정도는 그저 모기의 왱왱 거리는 소리에 불과하고 느껴진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은 매우 짜증이 났다)
그런 사소한 짜증이 스쳐가는 와중에 며칠 전 간신히 달리기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끝도 없이 연결되어 있던 전깃줄이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에 소박한 감동을 받았던 일이 나를 스쳐갔다. 아마 그 감동은 그렇게 무덥던 지난여름, 폭설로 건물도 무너지던 얼마 전의 폭설,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무수한 더위와 열기를 견뎌내면서 제자리를 지키는 그 무수한 전선 덕분에 전기를 이용한 모든 것들을 일 년 365일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당연하면서도 무척이나 고마운 진실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하지만 짧은 감동의 순간을 지나치자 고마움의 건너편에 있는 처연함의 그림자가 눈에 밟혔다. 이 세상에 마련되어 있는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수많은 미생(未生)들이 직장 안은 전쟁터, 직장 밖은 지옥이라는 현실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려고 애쓰는 것처럼 저 무수한 전깃줄 역시 쓰레기장보다는 높은 곳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믿으며 억지로 저기서 버티고 있는 것뿐일까. 나나, 전깃줄이나, 혹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저 떠나면 고생, 남아있으면 고통이라는 진실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존재일 뿐인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컴퓨터가 켜져 있기 때문이고, 추위에 떨고 있지 않은 이유는 전기장판이 따뜻하게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며, 내 방이 어둠 속에 잠기지 않은 이유는 전등에 불이 들어와 있기 때문일 것이고 그 모든 것은 항상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전선들이 자기 역할을 해주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너무나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초라하게 느껴지고 직장이라는 곳이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혀오는 시기가 있다. 그럴 때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설령 이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이유가 '월급'이라는 삭막한 진실일지라도, 전깃줄처럼 자신이 지키고 있는 자리가 이 세상에 어떤 따뜻함과 의미를 줄 수 있다고 믿어보자. 전깃줄도 줄 수 있는 작은 감동을 내 삶의 일부로 만들 수 있다면, 공포와 두려움, 무기력함을 넘어선 삶의 어딘가를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마음으로 하루의 끝에 따라왔던 짜증 웃어넘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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