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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산 키보드

작은 변화, 약간의 즐거움, 그런 하루의 끝

by 나이트 아울
키보드를 누를 때 들여오는 소리가 조금 더 경쾌해졌지만 그것은 결국 흩어져갈 수밖에 없는 즐거움이었다.


오랫동안 사무실에서 키보드 버튼 하나가 고장이 나 버렸다. 처음에는 고칠 수 없는 단계에 왔다고 생각해서 이래저래 찾아보다가 마음에 드는 키보드를 하나 구입했다. 원래 사용하던 키보드랑 높이나 감각이 많이 달라서 낯설었지만 적응의 동물이라는 호모 사피엔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재빨리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 익숙함으로 쉬는 날 잔업을 마치기 위해 토요일 점심때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새로 산 키보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거의 매일 같은 일이 반복되는 하루, 그런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하는 키보드가 달라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쩐지 일하는 느낌이 달라진 것 같았다. 열손가락으로 내 밥값을 벌어야 하는 무거운 현실이, 자판의 부드러움 하나만으로 조금은 가볍게 느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럼에도 내 삶에서 달라진 것은 없다. 이런 소비가 다 상술의 농간이고, 여전히 나는 다음 주에도 한 살 더 먹을 준비를 하며 바쁘게 일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좋지 아니한가. 삶의 무거움을 소비로 해결하는 그 많은 시도가 실패로 끝나는 게 대부분인데 작은 변화로 아주 잠깐이지만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어수선한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어떤 식으로든 내년에 이 세상에는 큰 변화가 올 것 같다. 그런 와중에도 내 삶은 지금처럼 작고 사소한 변화로 기쁨을 느낄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더 나은 삶은 작은 기쁨들로 채워져야 할 테니까( 물론 가급적이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기쁨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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