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양 감독(1985)
한 소녀가 있었다.
어느 날 소녀의 눈앞에 도저히 밀 수 없을 것 같은 바위가 놓여있었다. 소녀는 그 바위를 밀어서 산 꼭대기까지 올려야 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들었지만 그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소녀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바위 대신 다른 바위를 밀어 올리기로 결심하고 실천했다. 하지만 그때의 소녀는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다.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자신 앞에 놓인 바위를 산 꼭대기까지 올려야만 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바위를 밀어 올렸다. 그러나 남자는 소녀에게 자신과 같은 삶을 살라고 말하지 않았다, 바위를 밀지 않는다고 행복한 삶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건네지도 않는다. 그저 선택은 본인의 몫이라고 차갑고도 쓸쓸한 진실을 말할 뿐이다. 그리고 남자는 자신 앞에 놓인 바위를 밀어야 하는 미래를 견뎌내기 위해 담배를 집어든다.
한 여자가 있었다.
투박하지만 성실한 남자를 믿었고, 그 남자와의 행복을 꿈꾸었지만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거스르지 못한 끝에 여자에게 등을 돌렸다. 그 상실감을 벗어나기 위해 다른 세상으로 떠났고 그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바위를 밀어 올린 끝에 예상치 못한 정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여자에게도 바위는 무척이나 무거웠고 바위를 미는 시간은 외로웠기에 그녀 역시 담배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삶은 누구에게도 정답 비슷한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때로는 큰 상처를 입다 보면 어른이 된다는 말은 팔이 하나 잘리고 나면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처럼 잔인하고 공허하다. 팔이 잘린 사람은 팔이 없는 상태로 그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일 뿐 그 사람이 겪었던 고통은 정답에 도달했다는 안도감도, 미래는 행복할 것이라는 희망도 선사하지 않는다. 단지 그런 진실을 잠시라도 피해가 위해 모든 사람들은 무언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자신이 선택한 바위의 무게 앞에 쓰러져버린 소녀는 결국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담배라도 피울 수밖에 없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다시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자신이 선택한 바위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낙원으로 향하는 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횄다. 그리고 잠깐 동이지만 소녀는 낙원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바위 역시 속절없이 굴러 떨러 질 운명이라는 사실을 소녀는 알지 못했다. 그것은 소녀의 잘못도 아니고 소녀가 선택한 바위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 그저 '인생'이라는 모든 바위의 속성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소녀는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다시 한번 힘든 운명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렇게 소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 운명의 주인, 거창하게 말하자면 어른이 되었다.
다시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삶에서 어떤 미래를 꿈꾸지 않았다. 착실한 가장과 성실한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만으로도 그 남자의 삶을 충분히 버거웠기에 남자는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아마 그 남자의 최대의 일탈은 배우자에게 거짓말을 하고 얻어낸 시간을 아무도 없는 운동상에서 혼자 벽을 바라보며 벽과 함께 캐치볼을 하는데 사용하는 일 정도였을 것이. 그런 남자의 삶 역시 다른 모든 사람의 삶과 마찬가지로 끝이 있다. 남자는 자신의 삶이 끝자락에 와서 다른 세상으로 접어들기 직전에야 삶을 다시 인식하고 싶다고 되뇌인다. 하지만 그 남자에게는 그럴 시간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한 남자의 삶은 바위에서 해방되었다.
다시 한 여자가 있었다.
어느 날 찾아온 소녀가 자신에게 그간의 모든 일들에 대해 말하는 순간, 여자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버려둬야 했던 모든 것들을 떠올린다. 지금 여자가 보고 있는 경치는 오로지 바위만을 밀어 올리기 위해 노력한 끝에, 아주 잠깐 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여자를 늘 불안하게 한다. 하지만 여자는 이야기를 전하고 사라지는 이전의 소녀였던 누군가를 바라보며 바위의 무게를 견디는 일에 대해 한번쯤 돌아볼 것이다. 영화가, 다른 사람의 삶이 우리에게 거울처럼 다가오는 것처럼 그녀 역시 자신의 삶에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일을 뛰어넘는 무언가, 어쩌면 기쁨과 행복이라는 동화책 속의 단어를 다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순간이 오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