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보였다. 마지막으로 아내를 만났던 날이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정말로 다행히도 그녀와의 이혼은 법정에서 서로의 인간성을 한없이 깎아내리는 과정 없이 마무리되었고, 그녀와 남이 되는 모든 과정은 그녀의 변호사를 통해 무미건조하게 이뤄졌다. 그녀는 어느 날, 이혼하자는 짤막한 메모만을 남긴 채 그녀는 집을 나섰고 그날 이후 나는 그녀를 만나지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도 못하였다.
우리가 몇 년간 숨 가쁘게, 때로는 숨 막히게 함께 살았던 그 집에 발을 들였을 때, 아내는 등을 돌린 채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집 안의 온도는 기묘하리만큼 낮았다. 살갗에 닿는 공기는 서늘하다 못해 날카로웠고, 공기 중에는 오랫동안 환기하지 않은 방 특유의 퀴퀴한 먼지 냄새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메마른 향기가 뒤섞여 있었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햇살조차 온기를 잃은 채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을 뿐, 집 안의 정적을 깨우지는 못했다. 그게 그녀가 메모를 남기고 떠나지 전, 우리가 함께 했던 집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꽃다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내를 부르기 위해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올렸으나, 도무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에 커다란 돌덩이가 걸린 듯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나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 아니, 무슨 말을 해야만 했을까.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것은 뒤늦은 참회와, 이제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는 자괴감이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은 안갯속처럼 흐릿하지만, 처음 만났던 순간만큼은 박제된 표본처럼 선명하다. 내가 대학이라는 곳의 문턱 안쪽에 머물던 시절, 그녀 역시 같은 교정을 걷고 있었다. 다른 동기들이 술기운에 취해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기 바빴던 시절, 나는 도서관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무슨 원대한 포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기계를 책이라는 좁은 틈새로 조금이라도 들여다보고 싶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그 시도는 처참히 실패했고, 나는 지금처럼 형편없는 인간이 되었다. 하지만 1968년 8월 23일, 조셉 레겐스타인 도서관 2층 계단 오른쪽에 위치한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만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날,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녀에게 반했다.
경찰 일을 하며 수많은 파국을 목격했다. 야구 방망이와 망치로 서로의 머리를 부수고, 산탄총으로 심장을 날려버리는 부부들의 모습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죽음에 이르지 않더라도 서로에게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남기고 경찰서 취조실에 앉아 서로를 증오하는 일은 이 세계에서 너무도 흔한 풍경이었다. 나 역시 아내에게 서운한 점이 있었고,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구석이 있다. 그녀가 사무치게 미웠던 계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 나이가 되어 돌아보니, 우리를 갈라놓은 것은 그녀의 어떤 결점 때문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원인은 단 하나였다. 내가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1968년, 나는 그녀에게 반했고 일 년 뒤 그녀의 마음을 얻어 결혼했다. 하지만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내 마음속의 불꽃은 꺼져버렸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는 의무와 냉소만이 남았고, 그것이 모든 다툼의 근원이었다. 모든 비극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아직 사랑이 남아있던 시절, 나는 그녀에게 내 생일 선물로 꽃다발을 받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더 묻지 않았고, 그 후로 몇 년간 내 생일이면 거실 테이블 위에는 늘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쑥스러움이 많던 아내는 직접 꽃을 건네는 대신 늘 그렇게 조용한 방식으로 축하를 대신했다. 지금 내 눈앞에 놓인 저 꽃다발처럼.
그 순간, 날카로운 소름과 함께 깨달았다. 이 모든 상황이 내 꿈이라는 사실을. 나는 아내를 떠난 이후 단 한 번도 이 집에 들어온 적이 없으며, 홀로 맞는 생일에 꽃다발을 선물 받은 적도 없다. 이 차가운 집의 공기도, 정적 속에 앉아 있는 아내의 뒷모습도 모두 내 죄책감이 빚어낸 환영이었다.
하지만 꿈속에서라도 전하고 싶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내게 과분한 축복이었고, 그 축복이 재로 변해버린 것은 전적으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나의 무능함과 나약함 때문이었다고. 이혼 당시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숨었던 미숙한 나를 부디 용서해 달라고.
입술을 달싹였으나 목소리는 형체도 없이 흩어졌다. 꿈의 주인은 나였지만, 나는 이 세계에서 아무런 힘도 없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떨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보고 싶었다. 그날의 굉음 같은 총소리 이후 완전히 망가져 버린 내 삶이 영원히 닫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을 마주하고 싶었다. 이제 손끝이 그녀의 어깨에 닿기 직전이었다.
“그건 당신이 선택한 미래가 아닙니다, 칼 일라이어스.”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마치 절대적인 존재의 명령을 받은 것처럼 발걸음이 멈췄고, 손을 뻗을 수조차 없었다. 뒤를 돌아보자 내가 들어왔던 문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규칙적인 발소리가 고요한 거실을 울렸다. 이윽고 발소리가 멈춘 곳에서, 어둠을 가르고 핏기 없는 하얀 손 하나가 쑥 튀어나왔다. 그 손에는 탐스러운 국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본능적인 공포에 짓눌려 뒷걸음질 쳤다.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는 창백한 손과, 그보다 더 희게 질린 국화꽃들. 그것은 이 파국의 끝에서 다가올 나의 죽음을 미리 애도하는 조화(弔花)처럼 느껴졌다. 나는 등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아내의 뒷모습도, 거실의 정적도 모두 어둠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암흑 속으로, 다시 한번 비겁하게 도망치듯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