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엠 어 히어로 (2015)
1998년 10월 20일은 그전까지 국내에 합법적으로 들여올 수 없었던 일본 문화가 개방된 된 날입니다. 그리고 18년이 지난 오늘, 일본 소설과 만화는 아직도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유독 일본 영화만큼은 점점 관객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드래곤볼과 슬램덩크, 원피스는 어느 서점, 어느 만화방에서도 볼 수 있지만 올해 대한민국에서 일본 영화의 관객 점유율과 매출액 점유율이 1%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현재 일본 영화의 초라한 위상을 나타내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다른 분야와 영화의 차이가 크게 벌어진 이유는 좋게 말하면 전반적인 일본 영화가 자국 내에서만 흥행할 만한 작품 위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그렇게 제작된 작품들의 완성도가 좋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만화 원작의 일본 영화는 일본 드라마에서 보이던 특유의 과장된 연출과 만화적 표현이 그대로 영화에 반영되어 인물의 성격이나 대사가 작품에 녹아들지 못했고, 영화 후반부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장광설 장면은 유치함을 넘어 조악하고 안일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한줄기 희망 같은 작품이 사토 신스케 감독의 2015년 작 '아이 엠 어 히어로'입니다.
우선 이 작품은 장르영화의 틀을 차용하고 그 틀을 영리하게 활용하였습니다. 장르영화는 몇 가지 정형화된 이야기 틀과 인물을 바탕으로 하는데, 영화는 전형적인 좀비 아포칼립스물의 전개를 따라면서도 몇몇 유머러스한 장면에서는 독창적인 면모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존 작품들과 달리 뭔가 철학적인 메시지를 세상에 던지고 싶어 하는 인물의 일갈이 없었던 점도 무척이나 좋았고요. 이런 장점들의 상승작용으로 저처럼 원작을 보지 않은 분이라도 이 작품을 감상하고 나면 장르 영화가 주는 기본적인 재미만큼은 확실히 음미하고 극장을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영화는 성장영화의 모습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히데오(오오이즈미 요)는 영화를 통틀어 초반과 중반, 후반에 걸쳐 자신을 소개하는데 작품의 말미에 이름을 밝히는 장면과 허영의 상징인 어떤 아이템을 필요한 순간에 자신의 의지로 벗어던지고 단호히 일어나는 모습은 그간의 초라함과 나약함을 숨길 허영 그 자체와 결별하는 모습처럼 보였으니까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관객이 교훈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기어이 관객에게 교훈을 쥐어주겠다는 마음에 불필요한 대사와 연출을 넣는다면 그것은 작품의 가치가 메시지에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허영입니다. 최근에 제작된 바쿠만이나 기생수, 바람의 검심과 같은 만화 원작 영화들이 명상에 걸맞은 완성도를 보여준 것과 함께 아이 엠 어 히어로는 주인공이 허영에서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그간 만화 원작의 일본 영화가 놓지 못했던 메시지의 허영에서도 한 발짝 떨어진 작품으로도 기억될 듯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