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새 Apr 23. 2021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아내

그래, 당신이 가정을 지켰어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여섯 살 때 부모님은 이혼하셨단다. 아버지는 새파란 여고생과 바람이 나서 엄마에게 당당히 이혼을 요구했고, 자식 둘을 홀로 키울 자신이 없었던 엄마는 자식도 주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 내 자식 둘을 잘 키웠다고 자신할 수 없는 나라서 엄마를 탓할 순 없지만, 그때 만약 엄마가 우릴 데려갔다면 조금 더 부드럽고 소통하는 성격의 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해봤다.


내가 중3 때까지 그 젊은 새엄마는 아버지와 함께였고, 내막을 잘 모르지만 그즈음 집을 나갔다. 그 후로 아버지의 여자들은 너무 자주 바뀌었다. 나는 건넛방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와 새엄마들의 다투는 소리가 너무너무 싫었기 때문에 17살 무렵 집을 나왔다. 내가 집을 나오기 전에 형은 이미 음악 한다고 집을 나간 상태였고, 내가 집을 나온 후 어릴 때 입양했던 동생도 다시 시설로 보내졌기 때문에 그야말로 우리 집은 콩가루 집안이었다.


그러므로 내게 가족은 사랑하고 보살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나와 분리해야 하는 존재였다. 혼란스러운 아버지와 여자들의 관계 속에 나를 방치해서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세상엔 오직 나 혼자 뿐이고,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얼떨결에 아내와 가정을 꾸리고 나서도 나는 가정의 소중함을 몰랐다. 마마걸에 잠이 많고 체력도 생활력도 약한 아내를 깔보고 미워했다. 나는 빨리 성공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한데 아내가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첫째 애가 밤새 빽빽 울어댈 때, 달래다가 안되니 '고집 센 놈! 그래, 누가 이기는지 보자'하고 내버려 둔 적도 있다. 내가 잠을 못 자고 힘드니까 아이가 미웠던 것이다. 참 철없는 아빠였다.


언제나 내가 먼저고, 내 꿈과 성공이 중요했다. 가까운 친구들과 비교해 봐도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애정이 확실히 낮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이 다 크면 아내를 떠나 자유인이 되겠노라고 친구들에게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녔는데, 친구들 부부 모임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아내는 꺼이꺼이 서럽게 울어댔다.


유일하게(?) 내가 잘한 건 가족들을 데리고 민물낚시를 가주 간 거다. 물가에 텐트를 쳐서 라면도 끓여먹고, 휘어지는 낚싯대를 따라 올라오는 붕어의 얼굴을 보며 같이 행복해했다. 그게 없었다면 아이들과 나 사이에 어떤 정서적인 유대감이 형성됐을까 싶다.


어느덧 아이들 둘 다 독립을 했다. 나는 거의 해준 게 없다. 뼈빠지게 일해서 아이들 어릴 때 학원을 보내주지도 않았고, 독립할 때 목돈을 쥐어주지도 못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더 이상의 지원은 없다고 늘 강조했었다. 어릴 때도 의식주를 해결해 준 것 말고는 딱히 해준 게 없는 것 같다.


최근에 큰 아들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까지 자기가 지원을 해줬다는 얘기를 아내에게 들었다. 내가 워낙 독립심을 강조하니 내게는 쉬쉬하며 아들의 독서실비나 간식비, 책값 등을 지원해 줬다는 얘기였다. 나는 내심 미안해졌다. 알아서 벌어서 알아서 공부하기로 한 건 나와 아들이 합의한 부분이지만, 어쨌든 엄마의 은밀한 지원이 있었기에 공부에만 전념해서 합격을 한 거니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독립을 해서 내 짐을 덜어준 둘째도 고맙긴 하지만, 젊은 혈기에 무리한 투자를 해서 빚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던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가족 안에 있는 건 아내 덕분인 것 같다. 그만큼 가정을 지키려는 아내의 의지가 컸던 거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능력 있는 남자 만나서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아내라고 왜 없었겠는가.


갓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큰애는 아내를 닮아 사람을 좋아하고, 둘째는 나를 닮아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 같다. 둘 다 여느 경상도 머시마들이 그렇듯 막 살가운 편은 아니지만, 언제나 우리는 아내를 매개로 가족이라는 끈으로 묶여 있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었던 나와 아이들 사이에서 아이들을 품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도 아내였으리라.


나이가 들어서 이제 조금 깨닫는 걸까? 잘나고 못나고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족이 없으면 힘든 순간 누구에게 기댈 것인가. 2년 만에 무난히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큰애보다 사업 실패로 진 빚을 갚느라 허덕이는 둘째에게 더 마음이 간다.


<가족이 소중하다>는 말은 내겐 너무나 상투적인 슬로건이었다. '그래,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너희들은 그렇겠지'하는 비꼬는 마음이 있었다. 아내도 그렇게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건 아니다. 엄마와 언니들에겐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딴살림을 차린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자랐다. 




'자유'는 여전히 소중하다.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워지려고 우리는 매일 발버둥 친다. 하지만 무인도에서의 홀로 된 자유는 의미가 바랜다. 비록 돈 많이 못 벌어다 주는 남편이지만 내가 있으니까. 비록 최수종 같진 않지만 너희를 사랑하는 아빠가 있으니까. 출세 못한 아들이지만 제가 있으니까요. 우린 가족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아껴주면 더 사랑하게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