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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Sep 12. 2021

뜸 좀 들이는 행복

매스컴에서 세상이 급변한다고 겁들을 많이 준다. 요리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가정간편식이 유행하는 세상이다. 고진감래는 구닥다리 사자성어가 됐다. 요즘 세대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저당 잡힐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욜로(You Only Live Once)가 '즉시 행복'과 동의어일까? 어쩌면 우리가 행복마저도 즉시, 간편식으로 해결하려는 건 아닐까?


가족이라면 즉시 내 맘을 알아줘야 하고, 연인이라면 즉시 내 우울을 위로해줘야 한다. 영화를 보면 즉시 재밌어야 하고, 책을 보면 즉시 감동을 주어야 한다. 신곡을 15초만 들어보고는 이건 내 취향이 아니라며 다음 버튼을 누른다.


10여 년 전에 공기 정화를 위해 산 화분이 있다. 검색해 보니 아마 아레카야자인 것 같다. 중간에 많이 자라 분갈이를 해주면서 화분이 2개가 됐다. 나는 식물에 거의 무지하고 무관심했기 때문에 분갈이도 이전 가게 주인댁에서 해줬다. 마당에 화단을 가꾸는 주인이셨기 때문이다.


분갈이를 한 후에 또 많은 세월이 흘렀다. 역시나 나는 화분에 무관심했고, 이 식물은 휘청거릴 정도로 키만 많이 자랐다. 최근 본 'EBS 건축탐구 집'에서 대단한 화원을 가꾸는 집주인이 대부분의 식물들에게 가지치기를 해주는 걸 보고,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하는 맘으로 나도 가지치기를 해줬다.


키의 거의 절반 정도를 잘라버렸는데, 하나에는 하루 이틀 만에 새 순이 돋는다. 나머지 하나의 화분은 반응이 없다. 죽은 걸까? 그동안의 무관심이 죄스러워진다.


나이가 드니 식물에 조금씩 관심이 간다. 느리지만 생명력이 강하고, 말이 없지만 존재감이 분명한 식물. 동물에 비해 정적이지만 그래서 더 섬세하고 정겨운 친구라는 느낌이 든다. 지구와 인간을 지켜주는 존재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모든 '즉시'가 그런 것처럼 '즉시 행복'도 폭력성이 있다. 그런 측면이 있다. 스스로에게 '즉시 행복'을 강요하는 건 폭력이다. 뜸 들일 시간을 안주는 것 말이다.


신호가 바뀌면 3초도 못 기다리고 앞차를 향해 요란한 경적을 울려대는 차, 서비스든 상담이든 자기 맘에 조금 안 들면 "당장 사장 나오라고 해"라며 고함을 치는 진상 고객, 즉시 맛있어야 하는 결과물을 위해 인스턴트 재료와 조미료를 범벅하는 요리들.


나의 행복과 편리가 타인 위에, 가족 위에, 지구 위에, 심지어 신 위에 있어야 함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우리가 은연중에 '행복'에게 폭군 행세를 함으로써 '행복'은 사라지고 '행복해야 함'만 남아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행복은 그런 게 아닌데. 행복은 은근하고 은은한 식물 같은 것인데 말이다.


자율배식인 직장에서의 점심시간에 나는 언제나 음식을 남겼다. 요즘도 남긴다. 최대한 맞게 담아오려 하는데도 좋아하는 반찬 앞에서는 '모자라면 어쩌나'하는 걱정 때문에 결국 많이 담게 된다. 잔반을 버릴 때마다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스스로가 참 부끄럽다.


아레카야자의 자른 가지에서 솟아나는 새순이 그렇게 예뻐 보인다. 거추장스럽게 길었던 가지를 버리고 새롭게 솟아나는 이 조심스러운 새순의 모습이 참 행복의 모습인 것 같다.


행복에게 호통을 치는, 사납고 성급한 폭군이 되지는 말아야겠다. 식물과 자연에게 배우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조용한 행복을 누릴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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