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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Mar 07. 2022

어둠이 나를 급습할 때

이 세상이 지옥 같은 감옥이라면

집에서든, 식당에서든 혼밥을 잘한다. 며칠 전에는 정말 혼밥이 싫었다. 맥주 한 캔이나 막걸리 한잔, 그저 그런 반찬과 함께 TV에 눈을 박고 먹으면, 시장기만 있다면 그럭저럭 잘 넘어간다.


하지만 그날은 우울했기에 밥 먹으며 수다를 좀 떨고 싶었는데,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게 슬펐다. 제일 만만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타 지역에서 이미 식사 중. 제 2의 후보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결국 나는 집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분노가 치민다. 슬금슬금 올라오는 분노는 대상도 없고, 풀 데도 없어서 어영부영 내 속에 있다가 알코올과 함께 희석돼 버린다.


먹고살기 위한 직장생활, 스스로 선택한 음악. 거의 이 두 가지 사이에서만 왔다 갔다 하는 생활. 가끔은 숨이 턱 막힌다.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용을 쓰고 있는 걸까?


밥벌이, 음악, 가족, 인간관계, 나 자신, 우주, 신... 모든 것이 감옥 같다. 내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자유의지는 고작해야 뭔가를 시도할 수 있을 뿐 확정 지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신마저 벗어난다면 그건 자유일까? 영원한 고립일까? 모든 것들이 순전히 내 자유의지만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고,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니 감옥이 아닌가? 이 미칠 것 같은 갑갑함. 그러니 지옥이 아닌가?


몇 안되던 친구가 점점 없어진다. 남아있는 친구들도 잠정 유휴 상태이다. 서로 자발적 관심을 가지지 않는 상태. 나를 아웃사이더로 바라보는 시선을 어느 정도 안 후에는 젊을 때처럼 순진하게 그들에게 달려가지 않는다. 내 삶이 그들에게 관심 밖임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나도 사실 그들의 대화거리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예상을 벗어나는 얘기를 꺼내지 못해서 내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렇게 나는 고립되는 걸까? 이미 고립된 걸까.


가장 오래된 친구도 주요 화제가 돈 빌려다가 안 갚는 장모와 처남 욕이다 보니... 안 들어줄 수도 없고... 답 없고 지루한 이야기다. 벌써 20년짼가.


아마 누군가에게 내 얘기도 그럴 것이다. 답 없는 음악계를 계속 두드리는, 현실감과 책임감과 철이 없는 중년 아저씨의 좌충우돌 희망고문 이야기?


이럴 땐 어둡고 침울한 영화가 보고 싶다. 행복한 척 가식 떠는 영화 말고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 아니면 <리틀 포레스트> 같이 예쁜, 예쁘게 포장한 영화도 좋다.


어둠은 성경에서는 대부분 악의 세력으로 묘사되지만, 물리적 어둠은 허물을 덮어주고 마음을 안정시켜주며 잠을 부르는 소한 존재다.


마음의 어둠도 필요악이겠지만, 아침이 오듯이 물리칠 방법도 알아야겠지. 어떻게? 누가 나의 내밀한 어두움에 귀 기울여줄까?


나도 결국  애완동물, 식물과 대화해야 하는 수순을 밟는 걸까? 그래! 뭐라도 삶을 지탱해줄 수만 있다면. 남들 보기에 다 가진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왜일까?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행복을 위해 선택할 길이 더 이상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마 최근 너무 자연을 멀리한 탓도 있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공간이 곧 내 삶 같아서 도시에서의 반복된 생활이 감옥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조만간 탁 트인 섬에 한번 다녀와겠다.


가족을 위한 희생으로써의 일 외에는 술과 영화감상이 생활의 전부인 지인의 삶이 일면 이해가 된다.


이 끝없이 추락하는 공허함에 익숙해져야 할까? 신께 기도를 드려야 하나? 어둠의 일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다. 피하고 싶지는 않다. 드러난 어둠은 어둠이 아니라고 했으니.


껍데기에 갇힌 내가 갑갑하다. 하지만 끝까지 가보려 한다. 껍데기는 또 다른 알맹이일 수 있고(양파처럼), 안은 반대편에서 보면 밖일 수 있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라도. 나는 생존해 있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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