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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Nov 09. 2023

잘 안돼도 해본다면, 마음의 손을 비우고

냉장고에 있는 방울토마토가 시들고 있다. 말라비틀어져 가고 있다. 단감이나 다른 먹을 것에 치여 - 주목을 받지 못해 - 제 고유의 맛을 발현하지 못하고 어쩌면 곧 음식 쓰레기통으로 직행할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재능도 이와 같지 않을까. 사용하지 않고 보관만 하면 처음의 노멀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시들고, 의욕이 상실되고, 더 못하게 된다.


얼마 전 사업하는 친구가 곧 화분을 출시한다고 했다. 부산에서 제법 잘나가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친구인데, 이제는 직접 제품을 제작해서 판매하려는 것이다. 투자금이 억 단위가 넘는다고 하니 제법 큰 프로젝트인가 보다. 얼마 전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그 친구가 말하길 화분 홍보 영상을 만들어 뿌릴 건데, 영상에 들어갈 음악을 나한테 만들어 달란다. 돈을 주고 의뢰를 하겠다는 말은 아닌 것 같고, 내가 작곡을 한답시고 설쳐대니 지나가는 말로 해보는 소린지 알 수 없어 대충 대답만 어어 하고 말았다.


10월 말쯤에 제품 소개 웹페이지와 사진들, 레퍼런스로 삼을 곡목 등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진짜로 만들어달라는 거였구나!' 부자인 이 친구에게 그동안 밥도 많이 얻어먹어서 곡비를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2022년 4월에 멘토로 모시는 작곡가 선배님의 레슨 과제물로 여섯 곡의 멜로디를 완성한 이후로는 작곡, 특히 곡을 완성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나는 호의로 보수 없이 곡을 만들어준다지만, 어쨌든 상업적으로 쓰일 곡이기 때문에 대충 만들 수도, 내 취향껏 마음대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두려움을 안고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1년 6개월의 공백기 동안 10개월은 직장 생활에 빠져서 음악을 가까이하지 못했고, 나머지 8개월 정도는 시간 날 때마다 피아노 연습만 주구장창 했다. 곡 작업에 필요한 가상악기들도 컴퓨터가 애를 먹이면서 다 날린 상태였고, 한창 빠져서 곡 만들던 시절에 비해서는 내적·외적으로 인프라가 너무 안 갖춰져 있었다.


'알겠다'고 대답만 해놓은 상태에서 막막했다. 한창 시절처럼 아무 멜로디나 마구 떠오르지도 않았고, - 아! 정말 내 재능이 작곡이 맞나? 아무 멜로디도 안 떠오르는데? - 그렇다고 이론이나 연주 스킬이 뛰어나서 정형화된 어떤 패턴들을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도 없었다. 요즘은 좋은 세상이라 이미 만들어진 악기 샘플들을 쓸 수도 있지만, 샘플도 뭘 알고 감각과 음악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제대로 쓸 수 있다.


상황은 결코 작곡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조용히 흘러가지 않았다. 장인어른이 병원에서 겨우 연명하고 계신 상황, 막내가 속을 썩였고, 먹고사는 일 쪽으로도 새로운 제안이 들어와 신경 쓰고 준비할 게 많았다. 그래도 때맞춰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나는 거의 열흘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곡 작업에 매달렸다. 


전혀 나올 것 같지 않던 멜로디가 한밤중에 피아노 앞에 앉아 되지도 않는 음을 이리저리 치다 보면 나왔다. 신기하게도 반주와 붙여보면 그럴듯한 멜로디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곡이 완성되어 갔는데 완성된 곡을 가족들, 과거에 음악 했던 형, 그리고 무엇보다 곡을 사용할 친구가 만족스러워해서 나는 상당히 기뻤다. 일단 성공한 것이다.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곡을 만든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지인의 유튜브 채널송이었는데, 곡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 채널에서 딱 한 번 소개하고는 사용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들어봐도 완성도가 많이 떨어지니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번 두 번째 곡은 홍보 영상 속에 들어가 세상에 뿌려질 테니 곡비는 못 받았지만, 나의 공식적인 프로필로 쌓일 것이다.


내가 이번 곡 작업으로 얻은 가장 큰 성과는 작곡에 대한 조금 더 구체적인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의뢰로 곡비를 받고 작업을 하더라도 이제는 할 수 있겠구나, 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프로들에 비하면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시작해도 되겠다는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내게 곡을 부탁한 친구에게 양면 명함 제작을 부탁했다. 그 친구는 디자인을 하니까. 한쪽은 작곡가, 한쪽은 작가로... ㅎㅎ 음악과 글로 만나고 소통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만큼 한발 앞서 명함을 만들어도 될 것 같다. 아니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행동이 재능을 부르니까. 하면 결국 무언가가 나오니까.


내가 너무 부담스러워서, 곡을 안 쓴 지가 오래돼서, 돈을 못 받으니까 친구의 부탁을 거절했다면 어땠을까? 결국 나는 작곡에 더 자신감을 잃었을 것이다. 분명히 곡 작업을 의뢰받았을 때는 잘 안되는 상태였다. 준비도, 환경도, 스킬도, 아이디어도, 영감도... 모두가 부족한 상태였다. 그런데 시작했고, 하다 보니까 뭔가(아이디어, 영감)가 떠오르고 연결되어 결국 완성이 되었다.


지금 쓰는 글도 마찬가지다. 일주일 두 번 연재는 무척 부담스러운 횟수다. 쓸 거리, 쓰고 싶은 글, 쓸 수 있는 글이 얼마나 된다고... 브런치에서는 크리에이터로 선정됐다고 알람이 와서 글을 계속 쓰라고 부추긴다. 내가 순진해서 브런치의 속셈(?)에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도 일종의 노동이라고 유명한 작가들이 이미 검증한 체험들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힘들어도 나 또한 그것을 실천하는 중이다. 무엇보다도 내 글을 통해 변화하는 독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크나큰 글 쓸 동기를 부여해 준다.


내가 구독자도 몇 안되는 시답잖은 작가라고 여기고 글쓰기를 중단했다면 이런 일이 생겼을까. 잘 안돼도 했기 때문에, 못해도 했기 때문에 역사들이 일어났다. 작곡도, 글쓰기도.


잘하는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할 필요 없다. 잘한다는 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고정관념이 아니다. 실용음악과를 나오면 오히려 명곡을 작곡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존에 해왔던 이론과 스킬에 갇히기 때문이다. 외국의 유명한 재즈 뮤지션 중 악보를 볼 줄 몰랐던 경우는 흔하고, 우리나라의 서태지, 악동뮤지션 같은 뮤지션도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지금은 이전보다 훨씬 열린 시대다. 방송국에서 유튜브 스타를 섭외하는 시대다. 국문학과나 실용음악과를 졸업하지 못했어도, 못하는 그 상태가 잘 할 있는 상태 - 마음의 빈손, 백지상태 - 이니 자신감을 가지고 한 발 내디뎌 보면 된다. 여러분 속에는 그간의 삶을 통해 쌓여 있는 수많은 영감들이 있다. 그것을 믿고 가보라. 출발하고 나서도 잘 안된다 하더라도 조급증을 버리고 하나씩 해보라. 풀려고 하는 자에게 답이 온다. 


해보는 것과 마음의 손을 비우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사 전부가 우주고 자연이라면 나 또한 우주와 자연의 일부이므로 나를 통해 그것들이 해결되고 해소될 수 있다. 못한다는 생각, 잘한다는 생각 모두가 아집이고, 자만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만이 겸손이다. 빈손이 되어야 우주가 주는 것을 받을 수 있다.


몇 년 전 재즈콘서트에서 심수봉 선생님이 그런 말을 했다. 곡은 어떤 존재가 자기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자기가 경험과 실력으로 곡을 쓰는 게 아니란 말이다.


곡이나 글처럼 직접적인 창작 활동이 아니라도 모든 재능의 발현은 같은 원리인 듯하다. 해보는 것과 마음의 손을 비우는 것이 중요하다. 실패로 끝나더라도 그건 내 속에 쌓이는 자산이다. 내가 만들어 유튜브 채널에 올리곤 했던 허접해 보이는 수많은 곡들이 없었다면 나는 친구의 CM송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업하면서 그런 경험들이 많은 도움이 됐다. 실패와 시행착오의 경험들이 전문가를 만든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기다리지 말자. 그런 순간은 아마 안 올 것이다. 삶은 불확실성의 연속 아니던가. 돈도 많고, 시간도 많고, 문젯거리도 없어 내가 원하는 그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그런 파라다이스는 삶에서 잘 오지도 않을뿐더러 온다고 해도 실제로는 파라다이스가 아닐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잘 알다시피 너무나 간사해서 그런 환경이 되면 다른 유혹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내가 사기꾼이라서 작곡가이자 작가, 강사인 명함을 만들려는 게 아니다. 그 명함을 통해 나는 내년에 더 많은 활동을 할 것이다. 누군가는 내게 곡을 의뢰하고 누군가 내 글이나 강의를 기다릴 것이다. 나는 잘나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할 것이고, 그 결과물을 통해 그들도 나와 똑같이 용기를 얻어 또 다른 누군가를 도울 것이다. 이것이 재능의 선순환이 아닐까. 태양과 대지와 바다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의 순환처럼 말이다. 그 순환의 롤러코스터를 멀찌감치 멀뚱멀뚱 구경하는 삶보다는 롤러코스터에 함게 올라타서, 살아있는 삶을 살아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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