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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Mar 06. 2021

내 아픔 모르시는 당신께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인간이라서

나와 같은 세대라면 가수 조하문의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란 노래를 아실 것이다. 50이 돼서 주위를 돌아보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묵묵히 참고 견디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로운 느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태생이 자유주의자, 한량 기질이 있어서 '정말 이 일 아니면 죽는다. 못 먹고 산다'라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직업을 바꾸고, 직장을 옮겼다. 그 덕분에 한 직장을 오래 다니면 얻을 수 있는 혜택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잦은 이직에도 장점은 있다.


바로 다양한 삶의 현장, 체험을 통해 그 속에서 사람들이 겪는 각양각색의 고통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손가락뼈가 부러져서 수술을 하고, 과민성 대장증후군에 날마다 시달리면서 내가 절실히 깨달은 하나는 사람은 자기가 겪어보지 않고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깊이 공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4년 전쯤인가. 100kg이 넘는 거구의 폭행을 방어하려다가 손가락뼈가 부러지고, 간단한 수술이 될 거라는 의사의 말에 안심하고 임했던 수술마저 엉망이 됐다. 그 덕에 내 검지와 중지 사이는 마치 오리발처럼 붙어버렸는데, 항의하는 나에게 의사는 '수술동의서에 그런 내용이 다 있으니 억울하면 대학병원에 가서 물어보라'는 뻔뻔한 말을 했다.


나는 손가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수개월 동안 <그것이 알고 싶다> 지난 방송 분을 엄청나게 보고 또 봤다. 의료사고, 성폭행, 묻지마 테러 등 상상을 초월하는 이유로 불의의, 불행한 사고를 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사례를 보면서 분노하고, 공감하고, 해결책을 찾고 싶었나 보다.


그 일 이후 나는 손가락을 볼 때마다 분노가 차오르는 트라우마가 생겼지만, 고된 일을 하시다가 나보다 훨씬 심하게 손가락을 다치신 엄마에 대해서도 깊은 죄책감을 가지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 이전까지는 엄마의 그 고통에 대해서 정말 고통스럽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복수가 차서 응급실에 갔다가 몇 차례 수술 후 갑자기 돌아가신 절친의 어머니, 소송을 하고 싶지만 대형 대학병원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냐며 울먹이던 친구의 얼굴도 더 많이 떠올랐다.


나는 또 과민성 대장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음악에 몰빵하고 싶은, 활활 타오르는 내 열정을 엄청나게 방해하는 고약한 병이다.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 너무 많지만, 전원생활을 하며 가사도우미가 있는 갑부가 아닌 이상 내 몸에 맞는 음식을 끼니마다 챙겨 먹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형병원에서 한동안 알바를 했다. 코로나로 다들 힘들어 하지만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질병은 조금 과장해서 공기처럼 인간과 뗄 수 없는 애증의 관계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병원을 끊을 수 없는 사람들은 병의, 병원의 노예가 된 것 같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병으로 예민해진 환자와 가족들의 짜증과 분노를 감당해야 한다. 콜센터 직원이 그렇듯, 배달업체가 그렇듯, 마트 캐셔가 그렇듯, 학원 강사가 그렇듯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것이다.


화가 나도 "예예", 무례하게 굴어도 무응답, 바보라서 그렇게 응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크게 만들면 에너지 소모가 커지고, 시간 뺏기고, 피곤해지기 때문에 대부분 참고 그 순간을 모면한다.


내가 즐겨 보는 유튜브 채널 3개가 있다. <CBS 새롭게 하소서>, <세바시>, <근황올림픽>이다.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새롭게 하소서>를 보는 이유는 수많은 고통과 질병 속에서 희망을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화려함 뒤에 숨은 연예인들의 힘든 사연, 희귀 난치병을 가진 사람들의 대단한 삶, 수많은 실패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 가정폭력 등 가족의 상처를 이긴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세바시>, <근황올림픽> 도 비슷한 이유로 즐겨 본다. <근황올림픽>에는 속된 말로 한물간 사람들이 많이 출연하는데, 대중들에겐 잊혔지만 나름대로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진짜 모습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겉모습보다 훨씬 가슴에 와 닿는다.


'고통'은 어쩌면 우리가 평생 곁에 둬야 할 친구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고통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돌아볼 마음, '공감'이 생기는 게 아닐까. 많은 이직을 했지만 적어도 내가 일해 본 분야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측은지심과 존경심이 있다. 엄마는 자식을 키운 것만으로,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 살린 것만으로 참 대단한 일을 하신 것이다. 세상 곳곳에 숨어있는 고통들을 견뎌내기가 그리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내 아픔을 상대방이 알아주기가 쉬운 일이 아니듯, 나 또한 상대방의 고통을 알기란 쉽지 않다. 책으로, 머리로 아는 건 아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충고하기 전에 먼저 들어주며, 고통과 동행해야 하는 험난한 세상의 친구로서 서로 힘이 돼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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