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희망진찰

죽음을 기부한 사람

by 낭만딴따라

부고 한 장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드러냈다.

1.png 한국경제뉴스

연세대학교 생명시스템대학 신영오 명예교수. 지난 8월 22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그는 낙농 현장에서 우유 대중화의 길을 닦았고, 토양학의 발전에 그의 생을 바쳤다. 그러나 그가 남긴 가장 큰 흔적은 업적의 기록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선택에 있었다. 평생을 살아온 집과 부지를 학교와 대한성서공회에 나누어 기부했고, 육신마저 의대 해부학 실습용으로 내어놓았다. 그의 아내 또한 같은 서약에 동참했다.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떠난 사람이었지만, 부고장에 적힌 장지 ‘연세대학교’가 조용히 그 비밀을 밝혀주었다.




웰다잉, 잘 죽는다는 단어적 해석을 제외하면, 고통 없는 죽음은 불가하니 아마도 남은 생을 어떻게 마무리할 지,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인가를 묻는 고요한 질문 속에서 의미가 태어난다.


'늙음'은 이름을 잃는 일에서 시작한다. 형태는 떠오르지만, 혀끝에 맴도는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초성을 더듬거리다 놓쳐버리는 순간, 존재는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존재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의 특별함과 설렘은 평범해지고 바래진다.


그러나 나이 듦은 또 다른 선물을 건넨다. 사람을 보는 눈. 겉치레에 가려진 본질을 뚫어보고, 예의적이고 입에 발린 말보다 담백한 말에 마음을 주며, 신의가 있는 사람에게 오래 머문다.


옷차림도 마찬가지. 힘을 준 차림새에 눈길이 가지만 예전만큼 매력적이지 않다. 입고 있는 주인이 가진 미소와 품격으로 충분히 빛이 난다는 걸 안다. '옷'이 아니라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면 오래오래 그를 쳐다보게 된다. 젊을 때는 젊어서 화려하고 생기가 넘치지만, 50을 넘기고 나면 사람의 멋을 담은 차림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옷이 주인을 앞서는 순간, 그 멋은 쓸쓸하다.



나이 들수록 귀한 인연은 침묵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은 고요, 허공의 여백이 무겁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충분하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관계를 맺지만 그중 오래 닿는 인연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요즈음의 나는 사람의 신의 여부를 살피곤 한다.


바쁘게 몸을 움직이는 대신, 마음의 빈 공간을 가진 채로 세상과 만나는 연습이 필요하다. 작은 올바름에 기꺼이 함께하는 행동, 소소한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나의 중심과 타인의 중심을 헤아려보는 순간이 쌓여 시간이 되고, 영원이 된다.


세상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지치지 않을 만큼의 무리 없는 자신의 보폭으로 걸어보자. 아픈 몸도 삶의 일부다. 탓하지 말고 사이사이에 숨은 행복의 부스러기를 발견하기. 그 후에 “나는 그래도 괜찮게 살아왔다”라고 미소 지을 수 있다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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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은 꿈꾸는 이를 깨운다. 지평선을 뚫는 이른 햇살이 밤의 몽환을 흩뜨린다. 낮은 또 어떤 진실을 보여줄까. 아직 죽음을 기부하지 못하고 있지만, 오늘을 오늘대로 기대하는 삶을 살고 나면 나의 부고장이 덜 부끄러울지 모른다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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