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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재 Apr 01. 2020

보잘것없는 편지를 썼다

아마도 중학생 때였다. 국어 과목 숙제였는지 교내 행사였는지 기억은 없다. 어쨌든 나는 편지를 썼다.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거였다. 편지지에 빼곡히 글자들을 채워 나갔다. 내용은 기억이 안 난다. 다만 그 편지지가 지나치게 노랬다는 기억만은 선명하다.


쓰라고 하니, 책상에 앉아 정해진 분량을 꽉 채웠을 뿐이다. 그렇다고 대충 쓴 편지는 아니었다. 자발성은 부족했지만 소중한 사람에게 쓴 건 맞으니까. 그리곤 잊었다. 내가 편지를 썼다는 사실과 그 구체적인 내용을. 그저 편지지는 아주 노오란 색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편지가 나의 엄마를 통해 나의 큰 이모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과 나의 이모가 나의 보잘것없는 편지에 눈물을 보였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더 정성 들여 쓰지 못한 걸 후회했다. 싸구려 볼펜과 삐뚤빼뚤 손글씨를 후회했다.


나를 많이도 돌봐주시고 많이도 아껴주신 나의 큰 이모. 갑자기 팔이 빠진 어린 나를 데리고 엄마 몰래 병원에 간 기억을 수차례 복기하는 이모. 내가 착하다는 이모. 아주 가끔 전화드리면 '너 힘들어서 어떡하니 민재야'를 반복하는 이모. 큰 이모지만 큰 이모라고 부르지 않는 이모. 나만의 별칭 있는 이모. 아마도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별칭일 이모.


명절이 되면 이모를 뵌다. 그제야 자주 전화드리지 못한 게 죄송스럽다. 막 염색한 듯 지나치게 검은 머리는 날 울렁이게 한다. 이젠 내가 눈물을 보일 차례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벌써 꽤 오래전, 내가 편지를 쓰던 딱딱한 책상과 노랗도록 아린 마음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다.




|커버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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