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연 나를 알고 있는가?
주말을 맞아 근처 카페에 갔다. 아내와 함께였다. 길가에 노랑과 분홍의 꽃들이 좋았다. 햇살이 쨍하지 않아 좋았다. 주말의 햇살은 평일의 그것보다 확실히 평온한 구석이 있다.
강가에 위치한 작은 카페였다. 예전에 왔다가 기억해 둔 곳이었다. 아내는 흐르는 바람과 모습에 감탄했고, 나는 뿌듯했다. 카페 앞에서 봄 냄새를 조금 맡고 우리는 '오더 히어'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주문 도와드릴까요?"
카페지기가 물었다. 결정장애 부부는 꽤 고민하다 주문했다. 아내는 시그니쳐 라떼, 나는 생크림이 올라간 민트 음료를 주문했다.
"민트 괜찮으시겠어요? 손님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음료라서요."
카페지기가 다시 물었다. 아내가 옆에서 키키득 거리며 '치약 맛' 운운했다. 아직 아내는 남편의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민트가 좋다. 목에 찬바람이 스치는 듯한 느낌이 좋다. 내게 목구멍이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그러면서 약간의 각성을 주는.
"네 맞아요. 약간 치약 느낌이 나긴 하죠. 어떤 분은 멘소래담 같다고도 하시더라고요. 하하."
카페지기는 마지막까지 내가 주문한 음료를 부연 설명했다. 그의 멘소래담이란 말에 흠칫, 하긴 했지만 그냥 주문했다. 번복하기도 부끄럽고 민트를 정말 좋아하니까.
음료가 나왔다. 나의 민트 음료는 초록과 연두의 빛깔이었다. 음료의 색 마저 내 스타일이었다. 생분해성 재질의 빨대를 꽂아 한모금 쭈욱 빨았다.
그런데 생각 같지 않았다.
한모금 다시 빨았다. 머리 뒤쪽으로 슬라이드 몇 장이 스쳐갔다. 아내가 치약을 운운하던 모습, 카페지기의 멘소래담 경고, 마지막으로 '네 주세요'를 자신 있게 외치던 나. 방금 전 상황이 메아리쳤다.
한모금 다시 빨고 생각했다. 목구멍이 확장되는 느낌. 나는 왜 실패한 것인가. 내가 메뉴 주문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한번 더 빨았다. 식도가 이쯤 있었구나 싶었다. 내가 언제부터 민트를 좋아했지? 나의 과거를 돌아봤다.
내가 처음 민트 음료에 손을 댄 건 '민트초코 할리치노'였다. 어느 브랜드 커피 전문점에서였다. 살얼음 민트 음료에 진한 아이스 초코가 더해진 메뉴였다. 알싸하고 달달하고 종종 씹히는 초코칩이 재미있는 메뉴였다. 아마도 이때부터였다. 내가 민트를 찾기 시작한 건.
다시 생각했다. 내가 정말 민트를 좋아하는 게 맞나? 정확하게 민트초코를 좋아한 건가? 아니. 그냥 아이스초코처럼 단 음료를 좋아한 건 아닐까? 화한 느낌이 좋은 걸까? 목캔디를 입에 넣고 물을 한 잔 마셔본다. 역시 화한 느낌이 좋다.
이제야 알았다. 나는 그저 '목이 화한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민트는 정확한 나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무려 7년 동안 민트를 좋아한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아내의 키득거림을 들으면서까지 말이다.
내가 처음 '민트초코 할리치노'를 마셨을 때 누군가 그랬을 것이다. 너 민트 맛 좋아하는구나. 나는 아마도 먹을 만하다며 고개를 끄덕였을 거다. 정확한 나의 취향도 모른 채. 그렇게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민트 애호가가 되었는지 모른다.
이런 의문이 든다.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취향이 정확한 것인가. 더 나아가, 나는 과연 나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알기 힘든 것, 그게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어떤 일을 선택할 때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좋아하는 거라 생각하고 선택했는데 아닌 경우 말이다. 이런 일이 '취미'일 경우 그만두면 되지만, 이런 일이 '직업'일 경우 괴로워진다. 나중에 보니 아닌 경우, 막상 겪어보니 생각 같지 않은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스스로 한 선택이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이 더욱 괴롭다.
나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면(행복하려면), 나를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나를 끊임없이 찾고 나를 공부해야 한다. 이것이 민트 음료 한 잔이 내게 알려준 깨달음이다.
아마도 나를 찾는 여정은 쉽게 끝나지 않을 듯싶다. 쉬운 일이었다면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겠지. 그러니 더욱 가열차게 나를 찾아봐야지, 다짐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민트 사탕을 굴리던 입에 냉수 한 잔을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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