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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재 Jun 04. 2021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

비행기를 탑니다

연차를 내고 제주도에 다녀온단다. 나 말고, 우리 아내가 말이다. 하루 연차에 주말을 끼고 다녀오는 일정인데도 아내는 걱정이 태산이다. 이래도 되는 거냐고. 부서에 민폐 아니냐고.


그녀가 웃다가 울기를 반복한다. 성산일출봉에 오를 거라고 아이처럼 신이 나 떠들다가 갑자기 한숨이다. 짐을 싸다 말고 걱정한다. 이번엔 꼭 백록담을 보고 올 거라고 좋아하다가 다시 고뇌한다.



부서장님도 잘 다녀오라고 했다며.



불편한 마음으로 제주도 갔다가 맛있게 먹은 흑돼지에 체할까 싶어, 난 그녀에게 위로를 건넨다. 정당하게 연차를 쓰고 가는 거지 않냐. 부서장님도 허락하지 않았냐. 겨우 하루 연차다. 괜찮다. 눈치보지 마라. 부서장님도 '업무는 잠시 잊고 편하게 다녀오라'고 하지 않으셨냐. 좋은 상사를 만난 데에 우리 감사하자.


십 년 넘게 직장 생활하면서 연가 한 번 써보지 못한 티를 팍팍 내는 그녀다. 내가 빠지면 다른 사람들이 바쁘지 않겠냐는 '걱정인형'이다. 그러면서 신난 모습은 숨기지 못하는 '어린아이'다.


제주도 가기 전후로 코로나19 검사만 철저히 하자, 나머지 걱정은 다녀와서 하자, 이렇게 그녀를 다독인다.





나도 내가 없으면 안 된다 생각했었다. 정말 열심히 일했고, 나를 대신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자만, 그리고 자기합리화에 빠져 살았다. 해가 바뀌고 부서가 바뀌고 업무가 바뀌어도 그 생각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제 역할을 다 해야겠다는 생각이, 지나친 책임감으로 발전해 내 일상까지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한발 물러나서 보게 되었다. 내 일과 내 자신과 내 삶을.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우리는 매일 일을 한다. 물론 맡겨진 일은 열심히 해야 한다. 그것은 월급으로 맺어진, 직장과 직장인 사이의 약속이자 예의이다. 최소한 1인분 정도의 역할은 해야 한다. 내가 0.5인분을 하면 다른 사람이 1.5인분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2인분의 일을 자처하는 일이 필요할까 싶다. 우리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지만, 일 자체가 우리 존재를 대변하는 건 아니다. 일은 필요하지만 일상도 필요하다. 나와 당신은 모두 '그 적정선'을 찾아야 한다.



이제는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없어도 회사는 사회는 돌아간다. 누군가 내 역할을 대신해 줄 것이다. 서운할 필요 없다. 나도 또 다른 곳에서 제 역할을 하면 된다. 애초에 정해진 역할 따위는 없다.


내가 없어도 괜찮다는 생각. 1인분 정도 하려는 생각. 2인분은 하려하지 않으려는 생각. 이렇게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언제든 떠날 수 있어 당당하지만, 적당히 책임감 있는 사람이고 싶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스스로 존중하는 삶을 살고 싶다. 세상의 통념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 결국 퇴직하고 싶다는 말은 돌려서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직장인의 꿈은 퇴직이라는 말처럼.





잘 도착했다고 아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주 날씨는 맑다고 한다. 막상 가 보니 생각보다 더 좋다고 한다. 그녀의 목소리에 걱정 따윈 묻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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