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서, 쓰지 않아서 괜찮은 일상
그날은 참 썼다. 3년 치의 업무를 한꺼번에 받았다. 나는 분명 1지망, 2지망, 3지망을 구분해서 썼다. 근데 세 가지 맛 업무가 모두 내 이름 옆에 적혀 있었다. 작은 내 눈을 꿈뻑였다. 오타인가. 내가 잘못 보고 있나. 하지만 26살의 젊은 내 눈은 정확했다. 젊은 게 죄지. 아무도 말이 없었다. 인생의 쓴맛이란 이런 거구나 싶었다.
조용히 썼다. 모두 뒤집어썼다. "아니오" 대신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를 외치며 내가 좀 멋있다고 생각했다. 바보. 군대물 덜 빠진 덜떨어진 놈. 같은 돈 받고 그렇게 일하고 싶니? 힘들다 말이라도 꺼냈어야 했다.
그날도 썼다. 내 인생과 내 시간을 다른 이들을 위해 썼다. 주는 술 다 마시고 나를 잃었다. 직장에서도 회식에서도 나는 없었다. 그들과 그들의 꽁무니를 쫓는 바보만 있었다. 퇴근 후에도 그들의 잔상이 남았다. 이상한 습관, 편협한 사고, 소모적이고 쓸데없는 관행들. 이건 아니다 싶었다.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했다.
그래서 썼다.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찾기 위해서, 라기 보단 죽을 것 같아서 썼다.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았으니까. 뭔지 모를 것에 이끌려 연필을 들고 아무 공책이나 꺼내 마구 적어 나갔다. 마음이 후련했다. 한편으론 답답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을 주는 이가 없었으니까.
다시 돌이켜본다. 내가 지나온 날들을. 얼마나 씁쓸했는지, 얼마나 뒤집어썼는지. 얼마나 소모하고, 얼마나 끄적였는지. 묻고 싶다. 당신이 지나온 날들은 어떠했는지. 혹시 당신도 썼는지.
아직 쓰지 않은 날들을 떠올린다. 그 날들이 너무 쓰지 않기를 바라고, 그 날들을 잘 쓰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괜찮다. 아직 우리에겐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다.
https://brunch.co.kr/@banatto/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