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민재 Mar 23. 2020

나는 승진하지 않기로 했다

그곳은 전쟁터였다

당신이 어느 술자리에서 이렇게 물었다 치자.

"선배, 승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생각보다 식상한 답변이 돌아올지 모른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남이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그러면서 인사고과를 챙겨야 한다. 윗사람들의 부름에 응답할 줄 알아야 한다. 전문성을 키우고 라인을 잘 타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이런 답변은 어떤가. 가끔은, 아니 생각보다 자주, 너 자신을 버려야 해. 상사에게 직언(直言)보다는 모범 직원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겠지. 가기 싫은 회식도 웃으며 달려가고 너 자신보다 직장을 우선시하는 건 기본. 야근은 필수. 너 자신 하나 버리잖아? 그깟 승진. 못할 게 뭐 있냐?




지난해에는 호랑이 굴에 내 발로 걸어갔다. 승진하려면 꼭 거쳐야 할 곳이라 생각했다. 너도나도 기피하는 부서에 들어가, 쉽지 않은 업무 중 하나를 맡아 일 년을 버텼다. 그땐 몰랐다. 내가 버티고 있는 줄은. 그렇다고 안 좋은 기억만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름 즐겁게 지냈다. 그리고 (아마도 신경성) 위궤양을 얻고 당당히 내 발로 걸어 나왔다.


고작 일 년이었지만. 생각이 변했다. 이렇게 살아 승진하느니 저렇게 살면서 맘 편히 일하자. 그렇게 난 그곳을 떠났다. 몸도 마음도 떠났다.


먼저 마음이 떴다. 이거 아니면 퇴사라는 생각으로 전보 희망서를 썼다. 떠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너도 나도 모두 나의 전보를 확신했다. 만세를 불렀다. 근데 더 힘들었다. 마지막 한 달은 정말 최악이었다. 떠나야겠다 마음먹은 그곳에서 나는 나를 괴롭혔다.


결국 성공적으로 부서를 옮겼다. 나는 원하는 부서에 배정되었다. 그리고 오늘 지나는 길에, 아주 잠깐 예전 부서를 들렀다. 그런데. 뭘 기대하고 간 건 아니었지만,


그곳은 전쟁터였다.


총알 대신 전화벨이, 돌격 앞으로 대신 업무 지시가 난잡하게 오가는 그곳은 전쟁터였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일 년을 버텼지. 떠나길 잘했다는 생각과 그곳에 있던 나를 떠올렸다.




승진. 입사 전에 승진을 생각한 적 없다. 이 일이 좋아 선택한 거니까. 승진은 어쩌면 누군가의 위에 서는 일이다. 사람을 관리하는 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디자인하는 일이다. 이건 분명 내가 하고 싶던 일이 아니다. 나는 원래 사람 사이의 엮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승진하는 코스 위에 있음을 알았다. 술자리마다 나오는 이야기, '야 형이라 불러' 하는 그들의 이야기. 거기에 동화된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다시 승진. 이것은 나의 꿈인가? 아니면 그들의 꿈인가? 승진하면 타인의 시선에 내 어깨가 좀 으쓱할까, 아님 그들의 구설수에 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할까. 승진하지 않음은 곧 무능인가? 이 프레임은 누구의 작품인가? 승진, 그것은 선택이 아닌가, 생각했다.


언제 또 변덕을 부릴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승진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 쉬운 일이 있겠냐마는, 완벽한 직장 생활이 어디 있겠냐마는, 명예와 욕심과 타인의 시선보다는, 행복과 건강과 나의 자아에 더욱 관심을 쏟을 거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래도 내가 승진을 한다면, 그런 나를 만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을 뿐이다.


나는 네가 스스로를 잃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고 믿어.

축하해. 그리고 고생했어.




https://brunch.co.kr/@banatto/7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