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딧 Dec 17. 2020

세상에서 제일 바쁜 게으름뱅이

완벽주의자(인 척) 그만 하고 싶다  

갑자기 발표를 할 일이 생겼다. 예전에 했던 발표를 다시 해달라고 부탁받은 것이니 크게 부담은 없었다. 하지만 준비를 제대로 하려면 최소 일주일 정도는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어째 시작도 전에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발표하는 건 달가운 일이 아닌데, 이렇게 촉박하게 하는 건 더 별로다. 그래도 나흘의 시간이 있으니 그렇게 나쁘진 않다. 전에 했던 슬라이드도 재활용하면 되니 큰 틀은 잡혀져 있고. 그럼 하는 김에 좀 더 욕심을 내어 볼까. 슬라이드도 예쁘게 만들고, 연습도 몇 번 하고 발표를 한번 잘해보자 싶었다. 완벽하게! 




첫날, 이전에 만들어둔 파일을 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준비할 내용이 많아 보인다... 작년에 만든 자료이니 올해 최신 자료도 훑어봐야 할 것 같고... 전보다 좀 더 인터랙티브 하게 만들면 좋을 것 같은데, 괜찮은 질문도 몇 개 넣어볼까? 비주얼 자료도 좀 더 완성도 있어 보이게 바꾸고... 개선할 거리를 찾아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내 욕심엔 끝이 없고, 목록은 점점 길어졌다. 일단 최근 논문부터 찾아보았다. 읽다 보니 더 중요해 보이는 논문들이 또 나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내일 마저 읽어야지 하며 일단 마무리를 했다. 할 일 목록의 1번 이후로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Pixabay


둘째 날, 계획했던 것보다 늦게 일어났다. 하루의 시작이 늦었다는 생각에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할 게 이렇게나 많은데, 오전 시간까지 이렇게 보내버렸다. 그런데다가 길고 긴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보니 부담이 생겼다. 다른 일들도 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일단 다른 일부터 처리하고 발표 준비에 집중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결국 발표 준비는 하지 못하고 하루가 갔다. 


셋째 날, 남은 시간은 이틀, 내 목록에 적힌 일을 다 하는 건 불가능하다. 갑자기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구글에 검색해보았다. '준비 없이 발표 잘하는 법', '벼락치기로 발표 준비 하기', '발표 잘하는 법'... 검색 결과는 시원치 않다. 나의 이 긴박한 상황에 딱 들어맞는 엄청난 꿀팁은 없었다.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을 추려 목록을 다시 만들었다. 그리고 애써 집중하려 했으나 왠지 이미 망했다는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자꾸 딴짓을 하게 되어 생산성은 0으로 수렴했다. 결국 열심히 준비한 것도 아니고, 쉰 것도 아니고 애매모호한 시간을 한참 보냈다.


@Cotton Bro


넷째 날, 발표 전날이다. 마음이 급 편해졌다. 아, 이젠 정말 시간이 없다. 시간이 허락하질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어차피 없구나.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슬라이드를 수정했다. 물론 내가 생각한 퀄리티는 아니다. 내가 하려고 했던 목록 중에 반에 반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투자한 시간 대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그리고 당장 마음이 급하니 후회와 걱정할 시간도 없다. 하지만 결국 발표 연습은 할 수 없었다. 될 대로 되라의 심정이 되었다. 


발표날, 발표는 그럭저럭 했다. 청중인 학생들도 별생각 없이 들은 것 같았다. 더 잘하지 못해 아쉬움은 남지만, 내가 잘했던 적이 있던가. 그냥 이 정도로 감지덕지다. 




그렇다. 나는 완벽주의자다. 정말로 완벽해서 완벽주의자인 건 아니다. 완벽하게 뭔가를 해낸 적은 손에 꼽을 것이다. 내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모자란 내가 완벽을 추구하고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완벽주의자다. 늘 완벽함을 꿈꾸고, 완벽에 가까운 기준을 세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바쁘다. 늘 비현실적인 목표와 계획을 세운다. 그걸 다 해내려면 난 정말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바쁘게 움직인다 해도 내 계획대로 다 해내는 것도, 내 성에 찰만한 성과를 내는 건 어렵다. 그리고 나면 스스로에게 곧잘 실망한다. 그래서 내가 만든 잣대들로 완벽하지 못한 나를 채찍질한다. 이런 과정을 반평생 거듭하고 나니 이젠 나 자신을 잘 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난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거라고 지레짐작한다. 그래서 벌써 힘이 빠진다. 그리고 완벽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게으름을 피우며 불안에 떤다. 


@Karolina Grabowska


이론적으로 나는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에 늘 이상은 저 너머에 있다. 하지만 완벽주의라는 고질병에 빠져 버렸다. 완벽하지 못할까 봐 시작도 하지 못한다. 일은 하지도 않으면서 잘 못하면 어떡할지 걱정하느라 매일이 바쁘다. 


이런 나도 마음을 가볍게 먹을 때가 있긴 있다. 바로 내가 결과에 연연하지 않을 때이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드는 무언가를 할 때는, 난 한없이 쿨해질 수 있다. 뭐든 그냥 하고 만다. 심지어 데드라인보다 일찌감치 끝내 놓고 놀 때도 있다. 크게 욕심을 부리지도 않고, 완벽을 위해 나 자신을 갈고지도 않는다. 내 역량의 부족으로 어차피 완벽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단 걸 알기에... 그런데 그렇게 얼른 끝내고 치워버리면 기분도 더 좋다. 내가 아주 효율적인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자기 효능감도 느껴진다. 그리고 결과를 크게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할 일도 별로 안 생긴다. 


@RF Studio


걱정하느라 바쁜 이 게으름뱅이의 희망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잘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때, 난 잘할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그게 내 성질이다. 그러니 한 번도 도움된 적이 없는 완벽주의는 제쳐두고, 그냥 해버리자. 완벽하지 않은, 게으름 피우기 좋아하는 나에게 맞는 목표를 세우고, 내가 좋아하는 가성비 좋은 결과를 추구하자. 최소 노력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결과를 낼 수 있게... 그리고 무엇이든, 내 앞에 높인 이 과제가 끝이 아니란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뭐 하나가 끝나면,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또 다른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 이게 내 인생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장인정신을 발휘하다가는 다음 과제를 시작하기도 전에 또 의욕을 상실한다. 그러니 힘을 쫙 빼고, 적당히 해야 한다. 이러다보면 정말 잘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들이 온다. 그 때를 위해 체력을 아껴두자. 


그리고 한가지 중요한게 또 있다. 게으름을 피울 땐 그냥 게으름을 피우자는 것이다. 쓸모없는 죄책감도 완벽주와 함께 저 멀리 치워두고. 쉴 때야말로 완벽하게 잘 쉬자. 내 게으른 본성을 존중해주자. 그래야 필요할 때 또 갈궈댈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엉성한 크리스마스 트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