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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딧 Dec 20. 2020

새로운 취미는 자소서 수정

그리고 특기는 빈둥대기 정도

얼마 전 본 면접에서 취미를 물어봤다.

'취미라니, 지금 제 처지엔 사치라구욧!'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본심을 숨기고 대신 아주 평범하게 대답했다. '독서와 여행 그리고 요리를 좋아한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렇게 개성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나 싶었다. 독서는 많은 사람들의 취미 1순위이니 그렇다 치고. 여행은 글쎄, 굳이 싫어하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 그리고 취미가 아니어도 여행은 가까이든 멀리든 흔히 다닌다. 그리고 요리는 내게 살기 위해 하는 거니 취미라기 보단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활동 중 하나다. 취미로 요리라고 하기엔 요리 실력이 어디 내놓을 만한 수준도 아니다. 아주 특이하고 그럴듯한 취미를 얘기하고 싶은데... 예를 들면 승마, 수상스키, 도자기 굽기, 라틴댄스 같은 걸 얘기하면 좀 더 열정적이고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생각해보니 처음 네덜란드에 왔을 때도, 한국 선배 분이 취미를 물어보셨었다.

이것저것 찔끔찔끔하지 특별한 취미는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선배가 조언해주시길,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취미를 얼른 하나 만들라고. 그래야 길고 긴 겨울을 견딜 수 있다고 하셨다.


9월 개강에 맞춰 입국해 11월쯤부터 추워졌으니 겨울은 금방 찾아왔다. 그렇게 시작한 겨울이 3-4월까지 추우니 정말 지겹도록 긴 계절이다. 다행히 이 곳의 날씨는 아주 춥지는 않다. 12월 말인 지금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 코트를 입고 다녀도 될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의 강한 비바람은 한국에선 겪어본 적 없는 엄청난 세기로 바깥에 나가기 겁나게 한다. 자전거가 옆으로 밀려날 정도로 바람이 세게 부는 날도 있고, 멀쩡하던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는 날도 이어진다. 그러니 실내에서 할 수 있고 꾸준히 할 수 있는 취미를 가지라는 선배의 조언은 정말 지당한 말씀이었다.


하지만 난 그 현명한 조언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몇 년이 지나온 동안, 여러 가지 취미를 시도해왔지만 아직도 그럴듯한 취미가 없으니 말이다. 한동안은 피아노를 쳤었다. 네덜란드를 떠나는 친구가 싼 값에 넘기고 가서 얼떨결에 피아노가 생겼다. 잘 치지는 못하지만 몇 개 없는 아는 곡들을 치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하도 늘지를 않아 예전에 왜 열심히 안 배웠을까 후회도 하면서. 그러다 이사를 하면서 피아노를 치워두고 치지 않은지 오래다. 취미라도 좀 내 마음대로 되는 걸 하고 싶은데, 그게 안되니 흥미를 잃은 걸까. 베이킹도 간혹 하고 있다. 케이크, 빵, 파이 등등. 기본적인 기구도 갖추어 놓고 레시피대로 따라 하다 보면 딴생각할 겨를 없이 시간이 잘 간다. 그런데 베이킹에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결과물이 성공적이면 기분이 매우 좋고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들인 재료와 시간, 노력이 아깝고 허무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패한 작품이라도 아깝기 때문에 내가 먹어 치워야 한다. 요즘엔 아주 가끔 생각날 때, 누구 생일일 때만 하고 있다. 요가도 있다. 요가원에 열심히 다니다가, 요가원이 집에서 멀다는 이유로 집에서 유투버 요가 선생님을 보고 따라 하겠다며 관두었다. 막상 요가를 하려니 집 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요가 매트를 깔아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고... 생각해보니 이것저것 많이도 해보았다.


그래서 요즘 뭐가 제일 재밌냐, 뭘 하며 시간을 보내냐고 묻는다면... 딱히 없는 것 같지만, 취준생의 신분으로 당연 구직 활동을 가장 열심히 하고 있다. 틈만 나면 괜찮은 공고가 있는지 여러 웹사이트를 훑어보고, 괜찮은 포지션이 눈에 띄면 지원서를 준비한다. 아직 세상의 쓴 맛을 덜 봐서 그런지 나름 즐겁게 하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로 포지션이 많이 올라오지 않고 있어서, 치열하게 하고 있지도 못해 마음에 여유도 있는 편이다. 다른 SNS는 잘 안 하는 나지만 거의 중독된 사람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로고침을 누르며 확인할 때도 있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포지션이 보이면 마음이 급해진다. 지원 공고에 맞추어 이력서와 자소서를 수정한다. 기본적인 틀은 가지고 있지만,  최대한 핏이 맞아 보이도록 바꾸려면 이 작업도 꽤 시간을 잡아먹는다. 특히 내가 가고 싶은 자리는 아주 드물게 나타나기 때문에 (아직 정신을 덜 차렸나 보다) 좀 더 성의를 기울인다. 특정 표현들을 그 회사에서 더 많이 쓰는 말들로 바꾸기도 하고, 내가 했던 활동들의 순서를 바꿔 중요도를 다르게 보여주기도 하고... 지원 동기를 쓰려면 회사에 대해 잘 알아야 하니 어떤 회사 인지도 조사해보고... 그렇게 지원서를 작성해서 전송을 하고 나면 세상 뿌듯한 기분이다. 아직 지원 버튼만 눌렀을 뿐이지만 수고한 내가 기특해서 기분도 좋다.


글쎄, 이렇다면야 내 취미는 자소서 수정인가 싶기도 하다. 일단, 요즘 하는 활동 중에 가장 열정적으로 하고 있다. 또 동기 부여만 되면 나름 즐기며 할 수 있다. 즐거울 때는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두할 때도 있다. 그리고 고용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는 이상 금전적인 보상도 없다. 아직 그럴 일이 없었으니... 어째 취미의 조건에 대충 다 들어맞는다.


하지만 자소서 수정이 내 취미라니 슬프다. 면접장에서 이런 대답을 하면 슬프다 못해 너무 절박해 보일 것 같다. 무슨 취미가 좋으려나... 일단 자소서 수정이 필요없어지는 날이 와야 진짜 취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갑자기 취미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진다. 취미활동을 영위한다라는 것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니말이다. 아직 여유가 없는 나는 그냥 독서, 여행, 요리 정도에서 만족해야겠다. 아주 무난하긴 하지만, 적어도 틀린 말은 아니니까.


취미 다음에, 특기까지 묻는다면? 빈둥대며 쉬는 거라고 하고 싶지만... 그건 차마 안되겠고. 또 생각이 많아진다.


@Vlada Karpov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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