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아픈지 10년이 지났다.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급하게 입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동생은 외할머니가 데리고 가신다고. 지금 챙겨야 할 것들이 있으니 오늘은 집에 일찍 오라고 했다. 그 일을 시작으로 엄마는 건강이 괜찮아졌다 심해졌다를 반복했다. 늦둥이 막내아들이 고등학교 갈 때까진 살아야 할 텐데, 큰딸 시집은 보내 놓고 죽어야 할 텐데, 둘째 딸 애 낳는 건 보고 싶은데, 하면서 오늘까지 엄마는 살아있다.
코로나 백신 2차 접종 후에 엄마는 컨디션 회복이 힘들었다. 몸이 힘들다고 했다. 그러다 괜찮아지겠지, 생각했는데 5월에 병원에 갔다가 폐에 물이 찼다는 결과를 들었다. 그날 병원에 간 이유는 간암 치료를 위한 시술을 하기 위함이었다. 시술 일정을 미루고 폐에 물 찬 것부터 빼야 했고, 혈소판 수치를 올리기 위해 수혈을 받아야 했다. 일주일간 시술을 받기 위한 치료를 하고서야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온 엄마는 살이 10kg 정도 빠져있었다. 서울 다녀올 때마다 얼굴은 상해있었지만, 이 정도의 느낌은 받은 적이 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이 정도이니 엄마는 훨씬 더 불안할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엄마를 대했다.
너는 방학을 해도 어찌 엄마한테 밥 한번 먹으러 가자는 소리를 안 하냐고 내가 방학을 할 때마다 말했다. 늘 그 소리를 듣고서야 엄마와 둘이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엄마에게 만나자고 했다. 얼마 전 친구들과 먹은 순두부찌개가 별로였다고 해서 집 근처 순두부찌개 맛집으로 갔다. 다행히 여기는 맛이 괜찮다고 하셨다.
밥을 먹고 백화점으로 갔다. 엄마 생신선물을 사드리기 위해서이다. 늘 용돈 봉투로 드렸는데, 이번엔 선물을 사드리고 싶었다. 운동화와 화장품 중에서 고르라고 했다. 근데 엄마는 "너네 아빠 구두가 다 망가졌더라. 내 껀 놔두고, 아빠 구두 사주면 안 될까?"라고 묻는다. 아빠에게 전화했으나 절대 안 오시겠다 해서 결국 화장품을 샀다.
"가을 돼서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 이걸 꼭 발라야 돼, 안 그럼 얼굴이 쪼이거든. 근데 이리 비싼 걸 받아서 어떻게 하니."라며 좋아하시다가 돌아서면서 한마디 덧붙이셨다.
"근데.. 내가 이걸 다 쓸 때까지 살 수 있을까?"
뭔가 이 말이 꽤 오래 내 기억 속에 남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 말을 하는 엄마의 얼굴에서 난 죽음을 보았다. 엄마가 이렇게 죽음을 가까이 느끼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옛날 어르신들이 "잠결에 가는 게 내 소원이다."라고 하셨다는데, 이제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우리 엄마라는 게, 그리고 내가 그 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는 게 서글펐다.
오산 사성암은 "한 가지 소원이 꼭 이루어지는 도량"으로 유명하다. 나는 소원바위 앞에 서서 두 손을 합장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우리 엄마가 우리 곁에 있다가 떠나야 할 때, 그 마지막 시간이 많이 아프지 않게 해 달라고, 고통스럽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