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선생님 중에 지방 유명 학군지에서 학원을 경영하신 분이 있었다. 초등 아이를 둔 선생님들은 학군지에 대해서, 학원에 대해서 궁금할 때면 그 선생님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학원 운영에 회의감을 느끼고 학교로 돌아온 그 선생님은 학원에 대해, 사교육에 대해 고민하는 초등 엄마들에게 이렇게 조언하곤 했다.
“학원가에서 하는 말이 있어요. 초등학교 엄마들 지갑이 제일 가볍다고. 어리면 어릴수록 더 가볍죠.”
초등 엄마 지갑은 왜 제일 가벼워졌을까?
먹는 것도 자는 것도 혼자서 할 줄 모르던 갓난쟁이가 하루하루 성장하는 것을 보면 기적 같다. 옹알이를 하던 아이가 제대로 된 말을 늘어놓기 시작하면 내가 영재를 낳은 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그 순간 엄마는 꿈을 품는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내 아이, 너에겐 내가 못한 거 다 해 줄게, 네 꿈을 맘껏 펼칠 수 있도록 엄마로서 최선을 다할게.’
그 덕에 본격적으로 아이의 공부가 시작되는 초등학교 때가 되면 엄마는 남편과 자신에게는 굳게 닫았던 지갑을 사교육 시장에 과감하게 열어 준다. 내 아이를 위해서.
학부모와 교사를 대상으로 한 대학 입시 전략 연수에서 강사분들이 하는 고전적인 오프닝이 있다.
“아기 때는 우리 아이가 영재인 줄 알고 아인슈타인 우유, 파스퇴르 우유를 먹이다가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면 천재는 아닌갑다 하면서 서울우유를 먹입니다. 그리고 중학교에 가면 연세우유를 먹이고, 고등학교에 가면 부산우유, 그러다가 고3쯤 되면 건강하게만 자라 달라고 매일우유를 먹이지요.”
웃으며 들었던 농담인데 내 아이 이야기라고 생각하니 사뭇 진지하게 들린다. 아이의 학령기 중에서 아이의 미래가 제일 불확실하게 다가오는 때는 초등 시절이다. 내 아이가 어떤 재능을 꽃피울지, 어떤 분야에 어려움을 겪을지, 어떤 꿈을 키워 갈지, 어떤 친구 관계를 맺어갈지 모든 게 다 미지수다. 그 덕분에 아이의 초등 시절은 엄마에게 제일 희망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에 대한 불확실함과 희망의 공존은 아이의 미래에 대한 엄마의 불안에 더욱 부채질을 한다. 엄마는 내 아이의 행복한 미래가 너무도 간절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의 강점을 못 키워 주면 어쩌지?’
‘내가 물려준 약점이 아이의 발목을 잡으면 어쩌지?’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이 공존하는 초등 엄마들의 마음을 사교육 시장은 너무도 잘 안다. 사교육 시장은 엄마의 간절한 마음을 꿰뚫고, 아이의 미래를 볼모로 삼아, 엄마의 불안을 마케팅한다. 그렇게 초등 엄마는 사교육 시장의 주요 타깃이 되었다.
불안한 엄마는 어디선가 불어오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린다. 방과 후 축구를 하러 가서 옆자리엄마가 아이와 나누는 이야기가 들린다. 축구를 마치고 영어 학원을 가야 한단다. 갑자기 영어 학원에 다니지 않는 우리 아이가 불안해진다. 어느 영어 학원에 다니냐고 당장이라도 물어보고 싶다.
친구의 카톡 프사에 친구 아이가 수영하는 사진이 뜬다. 갑자기 우리 아이도 수영을 시켜야겠다는 마음이 요동친다. 하루 종일 주변 수영 학원을 서칭 하느라 하교한 아이를 제대로 반겨주지도 못한다.
아이가 친구랑 놀기로 했는데 그 친구가 학원에 가야 해서 못 놀았단다. 마음에 돌덩이가 내려앉는 것 같다. 다른 아이들은 학원에서도 친구를 사귀는데 이러다 우리 아이는 소외되는 게 아닌가 싶어 아이를 붙잡고 친구가 다니는 학원이 어딘지 캐묻는다.
주변 엄마들에게서, 유튜브에서, 단톡방에서 정보가 하루에도 수십 경로로 수십 가지씩 쏟아진다. 정보라는 이름으로 들려오는 소식은 엄마들을 매일매일 흔들고 조급하게 만든다.
이 조급함과 불안함을 해소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옆집 엄마와 함께 하는 것이다. 요즘 많이 한다는 예체능 학원, 요즘 유명하다는 국영수 학원, 옆집 아이가 한다는 학습지를 내 아이도 모두 하면 된다. 남들 하는 대로 하면 몸은 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다. 그렇게 아이는 수학 학원도 가고, 영어 학원도 가고, 국어 학원도 가고, 발레 교습소도 가고, 태권도 도장, 축구 교실도 간다. 하지만 아이가 성장할수록 엄마는 깨닫는다.
‘남들 하는 대로 하며 최선을 다한다고 한 것이 내 아이에게 악수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학교에 있다 보면 아이들의 성적이 자본주의 사회의 돈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에서 돈을 모아 삶의 기반을 마련하듯 아이들은 성적을 차곡차곡 모아 자기 가고 싶은 대학,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닦는다. 돈을 남이 벌어줄 수가 없듯 성적도 자기가 쌓아야 한다. 부모에게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는 이들도 본인이 능력이 없으면 결국 다 까먹게 되어 있다. 성적도 마찬가지다. 남이 올려줄 수가 없다. 부모에게 좋은 머리를 물려받았어도, 비싼 돈 주고 족집게 과외를 했어도 자신의 노력 없이는 한계가 있다.
결국 많이 하는 게 우선이 아니라 내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는 게 우선이다. 사교육에만 의존해서 아이의 역량과 성적을 높이겠다는 건 남에게 의존해서 돈을 벌겠다는 것과 같다. 아이의 미래를 타인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욱 불안한 일이다. 남들은 투자해서 다 부자가 되는 것 같은데 나만 벼락거지가 되는 것 같은 불안한 마음에 투자 전문가라는 사람의 말을 믿고 주식, 부동산, 비트코인을 무작정 따라 하다 보면 고점에 물려 만회하기 힘든 손실을 떠안게 된다. 그렇듯 남들 따라, 타인에게 의존해서 아이의 교육을 하는 사이 아이의 시간도, 미래도 잃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