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
인간은 태어나 어린 시절을 거쳐 청년이 되고, 본격적인 성인 시절을 거치며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며 중년이 되어 간다. 그리고 시간은 육체에 노쇠화를 가져오게 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됨으로써 긴 혹은 짧은 각자의 인생을 마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개인의 역사(歷史)라 할 수 있다.
에브리맨(Everyman). 모든 사람을 뜻하는 이 단어는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의 제목이자, 주인공 아버지가 운영했던 보석가게의 이름이기도 한데, 여기서는 일반적인 보통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즉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작가는 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소설 속으로 들어가면 주인공이 결코 ‘보통’스럽지 않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주인공의 세 번의 결혼 그리고 이혼에 있다. 뭐 그 정도야,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그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의 과정이 오롯이 주인공의 ‘바람(변태끼도 있다)’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가 그렇게 ‘보통’스러워 보이지도, ‘평범’해 보이지도 않는다.
첫 번째 결혼 후 그는 두 아들을 낳고 겉보기에는 순탄한 삶을 살아가지만 심적으로는 심하게 방황한다. 결혼에 대한 후회와 함께 족쇄처럼 느껴지는 삶 속에서 괴로워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탈출을 선택한다. 회사에 갓 들어온 신입 여직원 피비와 밀월여행을 떠남으로써 가족이라는 감옥의 공간에서 자유의 공간으로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두 번째 결혼. 피비의 애정어린 보살핌과 내조에도 그의 동물적 본능은 멈추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비서와 관계를 맺고 업무차 만난 늘씬한 덴마크 모델과 밀회를 즐긴다. 하지만 비밀은 없는 법. 그는 아내에게 쫓겨나고, 이혼당한다.
세 번째 결혼. 밀회를 즐겼던 덴마크 모델과의 결합은 최악의 선택이었음이 곧 드러난다. 육체적 관계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그녀, 심지어는 주차된 차를 옮기는 것조차도 스스로 하지 못하는 그녀와는 금방 파국을 맞게 된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육체적 본능을 쫓는다. 자신을 돌보던 간호사와 관계를 맺고, 더 나이가 들어서는 은퇴자들이 사는 해변 마을에서 조깅하던 젊은 여자에게도 추파를 던지기까지 한다. 그는 본능에 충실하는 것이 건강에 대한 증명이자 남자다움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은 거슬를 수 없는 법, 그는 그렇게 늙어가고 결국 죽음을 맞는다.
이 책은 남자의 본능에 충실함만 제외시키거나 줄인다면, 어쩌면 매우 평범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일 수 있다. 한 남자가 태어나 살다가 결국 병들어 죽는다. 끝. 하지만 이런 평범함에 대한 객관화가 아닌, 삶과 죽음까지에 대한 주관화, 즉 개인의 감정들이 아주 솔직하고 진솔하게, 때로는 충격적으로 느껴지고 공감된다면 이는 타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소설이 그렇기 때문에 삶을 다시한번 돌아보게 하고, 더 나아가 미래에 맞을 죽음까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한 평범한 사람이 늙고 병들고 죽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사람이라면 딱 이렇게 늙고 병들고 죽겠구나 하는 느낌 그대로를 전달해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그대로를 전달해준다. 괜히 초연한 척하지도 않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고, 어떤 감상에도 빠지지 않는다. 그냥 딱 이렇겠거니 하는 거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아마추어가 찾아낸 영감이라는 방해물이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어떤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감동 같은 것이 찾아온다.
옮긴이의 글처럼 ‘어떤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그런 감동이 이 책에는 담겨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주인공은 첫 번째 아내였던 세실리아에게서 낳은 두 아들로부터 자신이 경멸의 대상, 공격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공격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선택한다.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받게 되는 고통이,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자신의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독백한다.
인간의 행동에는 한 가지 이상의 설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천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 그러나 어른의 외모와 공격성은 갖춘 아이들. 그는 그들의 공격에 도저히 굳건한 방어벽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부재하는 아버지가 고통을 겪게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고통을 겪었고, 그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자신의 비행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이 그가 그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대가를 치르기 위해, 최고의 아버지나 된 것처럼 그들의 그 사람 미치게 만드는 대립을 다 받아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성적인 면이고, 반대로 내면에서는 이렇게 외쳐댄다. 아주 충격적이지만, 오히려 이 말이 더한 공감을 가져다준다. 이기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며, 어떻게 보면 ‘나쁜 XX’라고 생각들 수도 있겠지만.
"이 사악한 새끼들! 삐치기만 잘하는 씨발놈들! 할 줄 아는 게 비난밖에 없는 이 조금만 똥 덩어리들! 내가 달랐고, 일을 다르게 처리했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까? 그는 자문해보았다. 지금보다 덜 쓸쓸할까?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이게 내가 한 짓이야! 나는 일흔하나야. 나는 이런 인간이 된 거야. 이게 내가 여기 오기까지 한 일이고, 더 할 말은 없어!"
주인공은 노년을 해변이 있는 은퇴마을에서 보내며, 같이 사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미술을 가르친다. 하지만 학생들은 수업 중에 노년의 힘겨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내색하거나 말로 꺼내지는 않지만 그런 행동들—운동화에 물감을 잔뜩 떨어뜨리거나, 힘이 없어 붓을 놓치거나 또는 자신의 의지대로 그림을 그리기 힘든—을 보며 참으로 ‘너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 중 한 동갑인 한 여자는 달랐다. 그녀는 그림 실력은 물론, 수업에 열성적이었으며 가장 덜 너절했다. 그런 그녀가 수업 도중 갑자기 쓰러진다. 자신의 침대에 누워 충분히 휴식을 취하라고 하자, 그녀는 자신이 계속 참기 힘든 통증 때문에 고통 받고 있노라 고백한다.
“통증이 사람을 정말 외롭게 만드네요.” 그러면서 다시 허물어지며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정말 창피해요.”
“창피할 일 전혀 없습니다.”
“있어요, 있어요.” 그녀는 울었다. “자신을 돌볼 수 없다는 거, 궁상맞게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거...”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런 건 전혀 창피한 게 아니죠.”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은 몰라요. 의존, 무력감, 고립, 두려움... 그게 다 아주 무섭고 창피해요. 통증이 있으면 자신을 겁내게 돼요. 그 완전한 이질감이 정말 끔찍해요.”
의존, 무력감, 고립, 두려움, 완전한 이질감... 노년이 되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감정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창피하고 싶지 않아도 창피해질 수 밖에 없는 그런 무력감. 스스로에게 분노하게 될 지라도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더한 자괴감까지 들지 않겠는가. 그녀의 슬픔에서 무시무시하고 아련하며 진득하게 아픈 그런 공감—솔직히 하고 싶지 않은—이 느껴졌다. 저자는 이런 고통 때문에 노년을 이렇게 말한다.
“노년은 전투예요. 가차 없는 전투죠. 하필이면 가장 약하고, 예전처럼 투지를 불태우는 게 가장 어려울 때 말이에요.”
하지만 뒤에 이를 부인하며 이렇게 다시 말한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라고.
이 책은 다소 얇다. 190페이지 밖에 되지 않으니까. 게다가 매우 가독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빨리 읽는 사람은 2~3시간 정도면 완독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늦게 읽는 나 또한 하루 만에 끝냈으니까. 그러나 담긴 메시지들은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마음을 편하게 놓아두지 않는다. 삶과 죽음에 대한, 객관화가 아닌 주관적 감정, 더 나아가 옮긴이가 말하는 ‘무시무시한 감동’을 느끼고 싶다면 한번 읽어 보시라. 읽을 때보다 읽고 난 후의 여운이 훨씬 더 큰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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