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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칸양 Mar 31. 2017

나이를 먹는다는 것

아름다운 노년을 위해, 치열한 중년을 살아갑니다



저희 집에는 뻐꾸기 시계가 하나 있습니다. 아내가 뻐꾸기 소리가 싫다고 해서, 시간마다 뻐꾸기가 나와서 울지 않도록 조작해 놓았지만, 그래도 시계 안에는 언제든 뻐꾸기가 밖으로 나와 울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 시계 밑에 주렁주렁 달린 줄에는 사진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경주에 갔을 때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아마도 경주 문무왕의 수중릉을 찾아 갔을 때 찍은 사진인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아이들의 나이가 3살과 4살이었을 겁니다.



오래된 사진을 핸드폰 카메라로 다시 찍다 보니 다소 흐릿해 보임과 동시에 웬지 박물관이나 오랜된 먼지 쌓인 사진첩에서 꺼낸 듯한 사진처럼 보이는군요. 항상 그 자리에 걸려 있었고, 매일매일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았든 간에 시야에 들어왔던 사진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이 사진을 찍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날로그의 시간을 휴대성이 좋은 디지털의 공간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게 말이죠.



그리고 두번째 사진은 당시로부터 9년의 시간이 지나 다시 찍은 사진입니다. 참 밝아 보이죠? 첫번째 사진과 비교하면 참으로 뜨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 참 쑥쑥 잘 자랍니다. 그만큼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렸음을 알게 됩니다. 


이 아이들이 지금은 21살, 20살의 성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아이들이라 부를 수 없는 나이가 되었죠. 첫번째 사진으로부터 무려 18년이란 시간이 지난 겁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그 시간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 하는 아쉬움이 밀려 옵니다. 그리고 거울을 봅니다. 어느덧 이마가 부쩍 넓어지고, 눈꺼풀엔 이중삼중의 주름이 잡혀 있습니다. 또한 눈가에는 미세한 주름들이 자글자글 자리 잡혀져 있습니다. 이제는 그것들이 원래의 제자리인냥 어색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 사진 속의 얼굴은 그저 사진 속에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거울 속에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가는 중년의 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이게 지금의 나일까, 가벼운 한숨만 나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정신보다는 먼저 육체적인 부분에서 오나 봅니다. 30대에는 몰랐던 육체의 변화들이 40대를 거치며 비로소 실감나게 느껴집니다. 제일 먼저 오는 것이 치유시간의 지연입니다. 예전에는 피부에 생채기가 생겨도 금방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올라 복구가 빨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았나 싶어 상처를 들여다봐도 여전히 상처는 그대로입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아주 조금씩 진척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아예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확인 해야 비로소 상처가 나았음을 알 게 됩니다. 이제 피부의 회복 속도가 제 인내의 시간을 벗어났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그 사실이 심히 씁쓸해집니다.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하나 둘씩 늘어 나는 것이, 그리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또한 하나 둘 씩 나의 변화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 바로 나이를 먹어가는 일인가 봅니다.


나이 사십을 넘어서부터 글을 조금씩 써오고 있습니다. 2년 전부터는 매주 정기적으로 마음편지란 제목으로 칼럼을 쓰고 있고요. 그러다 가끔 습작도 하고, 주저리 주저리 낙서글도 쓰곤 합니다. 글이 잘 써질 땐 참 기쁩니다. 스스로 글쟁이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요. 하지만 그건 정말 순간 뿐이고 대부분은 글을 쓰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이 더 길고 많습니다. 그럴 땐 답답하기만 하지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더 안타까운 건 아무리 생각해도 글을 이어가는데 있어 꼭 필요한 ‘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미치고 팔딱 뛸 노릇입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일상 생활에서도 이야기를 하다가, 또는 직장에서 업무상 대화를 하다가 가끔 말을 멈춥니다. 제대로 단어(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이미 일상다반사가 되었습니다)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면 말을 더듬게 됩니다.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다른 대체 단어를 찾기 위해 알량한 머리를 굴리지만, 한계는 이미 정해져 있을 뿐입니다. 어떨 때는 얼굴까지 빨개집니다. 창피하기까지 합니다. 안 그런척 위장전술을 펴보지만, 그래봤자 스스로 더욱 처량해 질 뿐입니다. 특히 더 안타까운 순간이 있습니다. 내가 그러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고, 스스로 견뎌나가야 하는 부분이겠지만, 저와 동갑인 아내에게서 나와 같은 똑같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면 괜시리 더 가슴이 아픕니다. 늙어도 나만 늙었으면 하는 생각이 나쁜 생각일까요, 아니면 착한 생각일까요? 어느 쪽이든 상관 없습니다. 아내는 계속 젊었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건강하고, 발랄하고, 씩씩했으면 좋겠습니다... 욕심이겠죠?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것은 인생의 종착역, 죽음에 더욱 가까워 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고귀하고 소중한 이유는 바로 누구든 죽음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유한성의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반환점을 돌아,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육체적 부분은 시간이 갈수록 더 쇠해지겠지요. 그렇게 보면 남은 생 동안 성장하고 진화시키고, 변화할 수 있는 부분은 아무래도 정신적인 부분이 되겠지요. 어떻게 하면 죽음을 연장시키고 오래 살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죽어야 잘 죽는 것인가를 고민해야 될 시간이 될 것입니다.


나이를 먹는 다는 것... 노년의 생은 후회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성공을 하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실패를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건 ‘후회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여러 가지 제약에 의해 하지 못한 것들을 할 수 있는 여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만든 한계 때문에 행동하지 못했던 부분을 과감히 떨쳐 일어나 실천할 수 있는 막무가내 돈키호테(그래서 고전 <돈키호테> 완역판을 읽어보려고 합니다)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특정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마음이 끌리기 때문에 행했노라고 말하며 넉살좋게 웃을 수 있는 노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이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노년을 만들어 가기 위해, 저는 조금 더 치열한 중년의 삶을 보내고자 합니다. 지금 흘리는 땀방울 한방울 두방울이 모여, 저의 나머지 꿈을 이뤄갈 것입니다. 저는 다짐합니다. 그리고 확신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제 길을 꿋꿋이 걷겠노라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같은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삶, 치열하게 투쟁하는 자에게 행복이, 그리고 그렇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슬금슬금 다가올 것입니다. 그 기회를 모두가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매일 나이를 먹을 지라도.







차칸양

Mail : bang1999@daum.net

Cafe : 에코라이후(http://cafe.naver.com/ecolifuu) - 경제/인문 공부, 독서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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