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위기라 불리던 거대 폭풍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며
결혼하고 바로 다음 해인 1997년 4월, 첫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그 다음해에는 둘째까지 보게 되었죠. 연년생을 키우게 된 겁니다. 둘째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기쁨도 잠시, 큰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과연 낳아야 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서였죠. 왜냐하면 없는 살림이기도 했지만, 둘째를 가진 그때가 바로 IMF 외환위기가 막 시작되던 혼란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997년 11월 김영삼대통령의 IMF 구제신청 이후 뉴스에서는 끔찍한 소식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환율을 포함한 각종 경제지표들은 천정 모르고 솟구치기 시작했고, 자금줄이 막힌 수 많은 기업들이 도산 직전이라는 안타까운 소식들이 들려왔습니다. 곧 이어 대우그룹과 한보그룹을 필두로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차, 뉴코아, 해태 등 굴지의 대기업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기 시작했고요. 그에따라 직장을 잃은 실직자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죠.
게다가 도산하진 않았지만, 위기에 빠진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통해 수 많은 직원들을 명퇴라는 이름으로 직장 밖으로 쫓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외환위기로 시작된 국가경제의 위기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의 정상적인 흐름은 완전히 멈춘 채, 최악으로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는 듯 보였죠. 그 와중에도 정말 다행스러웠던 건 제가 다니던 회사 또한 당연히 실적이 나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대규모 구조조정까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급여 동결은 물론이고 상여금 보류, 각종 복지제도의 시행을 중지하며 최대한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했죠.
이런 상황에서 둘째까지 낳아 잘 키울 수 있을까 심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중한 생명, 그리고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을 저희 맘대로 끊을 수는 없었죠. 결국 아내와 저는 아무리 힘이 들어도 낳아 잘 키워보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찌보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긴 했지만, 결론은 이미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정해진 시간이 흘러 둘째가 우리의 품안에 안기면서부터,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먹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 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의 바쁘고 힘든, 인내와 고난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리 돈을 버는 것이 좋다지만...
연년생을 키우며 제일 힘들었던 순간 중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IMF 외환위기 동안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때문에도 힘들었지만, 더 고통스러웠던 건 아이들에게 먹여야 할 분유를 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분유값이 폭등하자, 제조사는 물론 유통사, 대리점에서까지 물량을 거둬들인 겁니다. 더 비싼 가격에 팔려고 말이죠. 대형마트는 물론 집 앞 수퍼까지 분유는 항상 품절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이유식을 할 수도 없는 상황, 수퍼란 수퍼는 다 뒤져 분유를 구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최소 10군데 이상을 샅샅이 찾아 다녀야 아주 어렵사리 분유 한통을 구할 수 있었죠. 그들의 비열한 행동에 화가 치밀었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좋겠지만, 갓난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분유를 가지고 그렇게까지 하면서 돈을 벌고 싶었을까요? 분명 자신들 또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이거나 혹은 이었을텐데 말이죠...
둘째 아이를 낳던 그 해에 제 신상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평택(송탄)공장에서 서울에 위치한 본사로 발령을 받은 겁니다. 아내와 상의하여 서울로 이사하기로 결정했죠. 하지만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전세를 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겁니다. 집주인에게 전세금 반환을 요청하자,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면 그때 돈을 받아 주겠다고 하더군요. 조금만 기다리면 금방 이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완전 착각이었죠. 불행히도 당시는 외환위기로 인해 거의 모든 세입자들의 발이 묶여져 있는 상황이었고, 그렇기에 정상적 방법으로 세입자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죠. 이때부터 집주인과의 실랑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정상가격으로는 세입자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세금을 낮춰 달라 요청했죠. 하지만 집주인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세입자가 들어오면 그 돈을 받아 이사가라는 말만 되풀이 하더군요.
결국 지인의 도움을 받아 법원에 전세금 반환 소송을 신청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집주인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경매를 하든 말든 상관 안하겠다는 거였죠. 집 가격이 이미 많이 떨어진 상태였고, 이 상황에서 경매를 진행할 경우 전세금을 온전히 다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큰 소리를 쳤던 거고요. 또 다른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저희가 살던 집은 집주인이 아닌, 사위의 명의로 되어 있었습니다. 건축일을 하던 집주인이 여러 채를 보유하며, 그 중 하나를 사위의 명의로 해놓았기 때문이었죠. 당시 사위는 여행사에 다니고 있었고, 저는 최종 조치로써 그 사위의 급여에 압류를 걸어야만 했습니다.
송탄에서 서울로의 출퇴근(당시엔 광역버스란게 없었죠. 그래서 시외버스터미널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본사에서의 새로운 일에 대한 압박과 스트레스, 그리고 소송신청을 위한 법원 왕래까지, 그야말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편치 않았습니다. 급여 압류소송을 위한 서류를 법원에 제출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퇴근길,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힘들고, 저 또한 사는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른이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노라 여길 수 있지만, 당시로써는 다시 겪기 싫은 끔찍한 경험이었던 것 같네요.
사위의 급여에 압류소송을 제기하자 그때서야 집주인이 이야기를 좀 하자며 연락을 해오더군요. 실랑이를 통해 전세금을 조금 낮출 수 있었고, 몇 번의 격한 대화를 더해 전세금을 조금 더 낮춤으로써 마침내 저희는 그 집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습니다. 어렵사리 전세금은 돌려 받을 수 있었지만, 서울에 전세집을 구하기 위해서는 다시 힘든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음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죠.
이사할 장소로 처음 돌아본 곳은 사당쪽이었습니다. 본사가 3호선 신사역 근처에 위치한 까닭에 그렇게 멀지 않으면서 전세값이 조금 쌀 만한(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곳을 찾았던 거죠. 당시는 IMF 외완위기로 인해 집값은 물론 전세값까지 많이 떨어진 시기라 그래도 어느 정도 집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찾아갔었죠.
당시 저희 수중에는 2,700만 원 정도가 있었기 때문에 대출 300만 원 정도를 얹어 3,000만 원 정도를 전세값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부동산에서 일하시던 분이 그 금액을 듣자 ‘픽’하고 웃더군요.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금액에 맞춘 전세 집을 보자, 제 생각이 많이 틀렸음을 알았습니다. 처음 보여준 곳은 반지하 방이었습니다. 반지하는 곤란하다고 하자, 다시 보여준 집은 사당역에서도 꽤 걸어 들어간 곳에 위치한, 정말 코딱지만한 방2개에 거실공간이 아예 없는 1층 다세대주택이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당을 포기하고 2호선 라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낙성대, 서울대 입구, 봉천 다 마찬가지였죠. 결국 신림동까지 가자 그나마 조금 나아지더군요. 하지만 그래도 3,000만 원으론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숨은 쉬며 살 순 있겠다 한 집이 3,500만 원이었습니다. 500만 원이 부족했죠.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을 하던 중, 우리의 악전고투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하셨던 장모님이 500만 원을 구해 우리에게 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신림동에 전셋집을 구할 수 있었고, 본격적인 서울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죠. 아, 장모님이 빌려주신 500만원은 열심히 모아 1년 후에 모두 갚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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