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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칸양 Feb 19. 2021

태일이

#80,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큰 아이가 늦는다. 2시면 집에 올 시간인데 5시가 넘어도 안 온다. 학교 도서관에 새 책이 오는 날이면 열 살 큰 아이는 새 책 구경하느라 늦게 오기도 했다. 학교 도서관은 4시 반에 문을 닫는다. 늦어도 4시 40분이면 집에 오는 아이인데 오늘은 늦는다. 초조해진다. 5시 반이 넘어 큰 아이가 들어왔다. 양 손바닥이 새까맣게 된 채로.


- 왜 이렇게 늦었어? 도서관 문 닫을 시간 훨씬 지났잖아?

- 도서관에서 새 책 구경하다가, 오는 길에 할아버지 좀 도와드렸어.


아이는 손을 씻으러 갔고, 나는 궁금했다. 어느 할아버지를 어떻게 도와드렸다는 걸까.


- 엄마, 태일이 알아? 태일이?

- 태일이가 누구야? 처음 듣는 친구 이름인데?

- 엄마, 태일이 몰라? 전태일!


오늘 큰 아이가 늦은 이유는 순전히 태일이 때문이었다. 전태일! 그 이름을 어찌 모를 수가. 하지만 나는 큰 아이가 하는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서 일부러 모른 척했다. 아이 말로는 학교 도서관에 새 책으로 태일이 만화 5권 시리즈가 들어왔고, 그걸 다 읽고는 태일이가 궁금해져서 문고판 전태일 평전을 찾아서 반쯤 읽었는데 학교 도서관 문을 닫을 시간이었단다. 큰 아이는 할 수 없이 반쯤 읽은 전태일 평전을 두고 학교에서 나왔다. 집에 오는 길에 평소에 항상 같은 자리에서 파지를 주워서 정리하시는 할아버지를 보게 되었고, 그 할아버지를 도와 파지 정리를 하다가 늦었다는 것이었다.


- 엄마도 그 만화 한번 봐봐! 특히 태일이 마지막 ‘5권 불꽃이 되어’가 제일 감동적이야.

- 어떤 점이 그렇게 감동적이었어?


큰 아이 말은 이랬다. 태일이는 ‘바보회’를 만든다. 바보회는 1968년 전태일이 만든 노동운동단체이다. 스무 살 태일이는 바보회를 통해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 평화시장 여공들의 이야기를 방송국에도 알리고, 노동청에도 알리고, 대통령에게도 편지를 쓴다. 아무리 얘기해도 들어주는 이가 없자, 스물두 살 태일이는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자살하고 만다. 태일이의 죽음으로 노동자들의 이야기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큰 아이는 그것이 감동적이라고 했다.


- 엄마, 태일이가 안 그랬으면 사람들은 몰랐을 거야.


이 순간, 나는 목숨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것이라고 말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012년부터 시작된 남편의 파업과 구조조정은 이제 마무리되었다. 파업과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노동조합의 도움을 얼마나 받았던가? 회사에 노동조합이 없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태일이가 살았던 1960년대처럼, 노동자의 이야기는 아무리 얘기해도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의 발달이 미래의 사건들을 얼마나 미리 잘 말해주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러한 계시는 어제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미 그 그림자를 던져온 것이었다.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을 세계라고 하는 극장 무대에서 주로 대사 없는 단역배우 역할만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더 크다. 이와 같이, 적어도 우리 존재의 일부는 수세기에 걸쳐서 살아온 것이다. “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175쪽)



태일이가 살았던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시대는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우리 존재의 일부는 수세기에 걸쳐 살아온 것으로, 개인의 삶이 어떤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대변이 될 수 있음을 느낀다. 나는 큰 아이에게 태일이 이후 노동조합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주리라 다짐해 본다.






                                                                              2014년 9월 29일


                                                            -- 김정은(변화경영연구소 10기 연구원) --


* 변화경영연구소의 필진들이 쓰고 있는 마음편지를 메일로 받아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해 주세요.




시인이자 작가 그리고 사회운동가였던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소장님이 지난 2월 15일 영면하셨습니다.


그는 재야운동가로써 과거에는 유신철폐와 독재에 대항하여 싸우고, 2000년대 들어서는 비정규직·해고 노동자들의 전국 투쟁현장을 비롯해 수많은 민주항쟁을 앞에서 이끌었던 노동자의 대표라 할 수 있던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초석이자 불쏘시개가 되었던 영원한 청년 전태일 열사의 투쟁에 감동받아 그가 지핀 노동운동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16년의 나이차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민주 투쟁 앞에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겁니다. 백기완 소장은 전태일 열사가 묻힌 마석 모란공원을 방문할 때마다 비어 있는 그의 묘소 옆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자리는 여기야. 태일이 옆이 내 자리야"


이제 그는 말하던 대로 태일이 옆 자리에 눕게 될 겁니다. 어렵게 해후한 두 사람은 어두운 밤부터 날이 샐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대한민국의 노동운동에 대해 토론하지 않을까요? 두 사람에 대한 존경과 마음을 담아, 백 소장님이 가사를 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다시 한번 나지막이 불러봅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차칸양

"경제·경영·인문적 삶의 균형을 잡아드립니다"

- 재무 컨설팅, 강의 및 칼럼 기고 문의 : bang1999@daum.net

- 에코라이후(http://cafe.naver.com/ecolifuu) - - 목마른 어른들의 배움&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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