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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성식 Dec 31. 2023

04. 다시 연주하는 일상

후쿠오카 (이민) 다이어리


  얼마 전, 엔화가 860원까지 폭락했던 날에 나는 기타를 사기로 결심했다. 내심 고민만 하기를 어언 2년간이었고, 어떤 브랜드의 어떤 모델을 구매할지도 결정해둔 상태였다, 틈틈이 시연까지 마친 뒤라 그야말로 돈을 내고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기타를 사지 말아야 할 이유를 궁리하고 있었다. 다시 연주를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선택일지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환율은 그저 구실일 뿐이었다. 프로도 아닌 내가 수백만 원대의 값비싼 악기가 필요할 리도 없었고, 결국 고른 제품도 한국에서 생산된 미국 브랜드의 OEM 모델로, 적어도 통장 잔고의 첫 번째 숫자가 바뀔 정도의 값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결제 카운터 앞에서 미적거리다가 다음 주면 엔 가치가 회복될 거라는 아내의 말에 카드를 건넸다. 실제로 엔화는 며칠 지나지 않아 920원까지 회복됐다. 구실의 힘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째서 기타를 산 걸까. 구실을 걷어낸 눈앞에 놓이는 장면은 3년 전, 인접한 도시인 나가사키에서 방문한 클럽의 풍경이었다. 우리는 3박 4일 동안 유럽식 고택과 성당, 중화풍의 차이나타운 따위를 돌아다녔는데, 호텔과 인접한 상가 건물 지하에 조그마한 라이브 클럽이 있었다. 입구에 붙은 전단엔 여행 둘째 날의 날짜가 붙은 공연 일정이 적혀 있었지만,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지역 밴드들의 공연이었기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내부도 클럽이라기보단 무대가 설치된 펍에 가까운 형태였다. 재밌는 것은 공연 중인 밴드뿐만 아니라 좌석에 앉은 관객들까지도 각자의 악기를 휴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공연이라기보다는 한동네 음악인들 간의 회합처럼 보였다. 


  당초에 외부인을 기대한 행사는 아니었던 듯, 우리를 맞은 종업원들도 약간은 의아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곤란해하거나 꺼림칙해하는 반응은 아니었지만 ‘이 한국인들이 우리의 공연에 만족해 주려나?’같은 우려가 스쳐 지나갔다. 우리도 이 동네 사람들의 공간을 침범한 느낌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입장해야 할지, 뒤돌아서 나가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새로 올라온 그룹의 기타 리프가 우리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1980년대의 LA메탈, 서부의 강렬한 태양을 연상시키는 경쾌한 비트가 타격을 던졌다. 


  ‘세상에, 아직도 이런 음악을 하는 팀이 있구나!’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적어도 4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어렸을 적 키스나 머틀리크루를 들으며 자랐대도 이상할 나이가 아니었다. 내가 기타를 배운 2000년대의 메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다 못해 무덤을 발굴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장르였고, 국내에서는 팬도 줄어 라이브를 들을 기회 자체가 희박해진 상태였다. 안 그래도 시골 출신인 나에겐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CD나 MP3로만 존재하는 음악이었지만, 이곳에선 회사원처럼 머리를 자른 20대, 30대의 친구들도 머리를 흔들며 즐기고 있었다. 


  어느덧 정규 공연이 끝나자, 다들 팀을 가리지 않고 올라와 합을 맞추기 시작했다. 사전에 곡을 정해두지도 않은 즉흥 연주였는데, 다들 실력이 출중하다 보니 레퍼토리가 정해져 있는 공연과 또 다른 묘미가 있었다. 딥 퍼플의 테마로 시작한 곡이 거의 40분 넘도록 이어졌는데, 도중에 연주자가 바뀌고 장르도 메탈에서 로커빌리로, 또 발라드로 변하며 오직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곡으로 변주를 반복했다. 우리는 멈추지 않는 음악에 거의 탈진할 만큼 내몰리면서도 한편으론 기예와도 같은 놀이가 계속되기를 열망했다. 


  그러다 잠깐 쉬는 시간이 됐다. 관객 겸 연주자인 참가자들의 관심이 한국에서 찾아온 우리 일행들에게 몰렸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느냐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오늘 공연에 대한 감상과 음악에 관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한창 듣고 있던 아내가 남편인 나도 한때는 밴드를 했었다며 기타도 꽤나 잘 치는 편이었다고 언급했다. 그러자 귀가 솔깃해진 멤버들이 나를 무대 위로 끌고 가려고 했다. 민망해진 나는 그게 벌써 8년 전이라며, 최근 몇 년 동안 기타는커녕 캐스터네츠도 쳐본 적이 없다고 거절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간단한 반주만으로도 괜찮다며, 나머지 진행은 자신들이 알아서 맞춰주겠다고 꼬드겼다. 더는 거부할 수가 없었던 나는 벽에 걸린 악기 중에서 펜더의 텔레캐스터라는 기타를 골랐다. 그나마 이전에 사용해 본 적 있는 모델이었지만, 막상 손에 들고 보니 모르는 여자의 손을 잡은 것처럼 낯설기만 했다. 소리나 제대로 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선곡권은 나에게 있었다. 나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최대한 단순한 악보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간신히 떠올린 노래는 라디오헤드의 ‘High&Dry’라는 곡으로, 도입부에서부터 끝까지 세 가지 코드로만 되풀이되는 구성이었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바로 선 자세로 첫 번째 코드를 튕겼다. 약간은 둔탁한 스트로크와 함께 드럼의 스네어 비트가 정박을 맞췄고, 미끄러지듯이 들어온 베이스 기타가 리듬감을 만들었다. 4/4박자 반주만 넣으면 되는 단순한 연주였으나, 나는 정작 내가 시작한 박자를 맞추지 못했다. 앞서거나 뒤처지기를 반복하다 보니 베이스와 드럼 같은 리듬 파트가 오히려 나에게 맞춰줄 정도였다. 리드 기타는 원곡과는 완전히 다른 변주로 내가 연발한 실수를 커버해주고 있었다. 


  나는 곡이 끝나자마자 허둥지둥 무대를 벗어났다. 관객의 박수는 호응이라기보다는 격려나 위로에 더욱 가까웠고, 나는 괜히 썰렁한 농담을 한 것처럼 민망한 기분이 됐다. 곧이어 새로 팀을 이룬 연주자들이 무대 위로 올라갔고 클럽은 다시금 흥겨운 분위기로 복귀하고 있었다. 나는 줄에 쓸려 따끔거리는 손끝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조명의 열기와 어두운 시야, 사이키 불빛에 쪼개진 관객들의 표정이 꿈속의 갈피 안으로 포개지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얼마 만의 합주였던 것인가.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됐지만, 20대의 나는 어떤 형태로든 음악을 계속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직업적인 소명의식이 있었다기보다는 10대 시절에 스쿨밴드를 시작한 이후 음악 활동을 그만둔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타 연습과 곡을 만드는 일상이 너무나 당연했기에 그것 이외의 삶의 중심을 발견하지 못했다. 프로가 되지 못한다면 직장인 밴드를, 그마저도 못한다면 홈 레코딩이라도 계속하겠지 싶었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은 간사한 법, 직장 생활의 답답함에 지친 나는 음악이라는 것에 일종의 구원을 바라게 되었다. 매일매일의 연습이 남들에게 없는 나만의 가능성이 되어주기를 바랐고 무의미한 일상의 전환점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프로급의 실력이 되면 이름 있는 메이저 밴드, 혹은 방송사의 기타 세션으로 전직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자작곡으로 나의 밴드를 만들어 음원 차트를 석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공상에 빠져들기도 했다. 물론 나에겐 그 정도의 재능도, 실력도 없었다. 


  기진맥진해져 퇴근한 뒤의 기타 연습은 내게 위로나 휴식이 아닌 또 하나의 부담이 되었고, 그건 밴드를 찾기 위해 만들었던 자작곡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 새벽 지친 몸을 다그치며 작업한 결과물들을 다시 들어보면 연주 상태도, 레코딩도, 분명히 참신하게 들렸던 멜로디와 편성도 차마 귀를 열고 들어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진심으로 도전하고 도전할수록 나에겐 연주자로서도, 작곡가로서의 가망이 없다는 확인사살이 돌아왔다. 


  딱히 그만두겠다는 결심도 없었다. 스탠드에 거치해놨던 기타는 가방 속으로, 벽장 속으로, 독립한 뒤엔 본가 창고의 깊은 구석에 방치돼 버렸다. 이펙터와 마이크, 레코딩 장비와 같은 주변기기는 아직 졸업하지 않은 밴드 후배들에게 나눠줬다. 어린 시절의 친구에게 고백했다가 차이자 억울한 마음에 절교를 선언한 꼴이었고, 나 자신도 그것이 웃기는 짓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음악이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오만함 또한 가졌던 것 같다. 은퇴한 운동선수들의 폼이 현역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10년 넘게 훈련한 손끝의 감각도 근육의 기억 속에서 유지될 줄 알았다. 


  그렇기에 나가사키에서의 경험은 충격이었다. 신체 기능 중 하나를 영구히 상실한 것 같아 서글퍼지기도 했다. 악기를 수집하시는 장인어른이 사용하지 않는 기타 한 대를 빌려주시기도 했지만, 다시 연습을 시작한다는 결심은 부담스러웠다. 한 번 헤어졌던 연인과 재회하게 됐을 때의 무게감이라고 해야 할까. 두 번은 없다는 압박감이 나 자신을 몰아붙이고, 또 실망하게 만들 것 같았다. 


  그런데 유혹이 너무 많았다고 해야 할지, 일본은 유별날 정도로 록 그룹의 인기가 대중적인 나라였고, 나의 지인 중에도 이미 밴드를 하거나 좋아하는 그룹이 있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더는 기타를 치지 않는다는 점을 아쉬워하며 이런저런 공연과 악기 전시회 등에 끌고 다니곤 했다. 그중에서도 결정적이었던 건 매년 열리는 나카스 재즈 페스티벌로, 변화가 블록 전체를 전국구, 지역 뮤지션들이 참여하는 무대로 꾸미는 도심형 축제였다. 공연도 물론 훌륭했지만, 나의 가슴을 뒤흔든 것은 나카강(江)의 다리 위에서 열린 연주자들의 뒤풀이였다. 관객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한밤중이었음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서로를 더하는 끝없는 연주에 심취해 있었다. 브라스 밴드가 모여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돌림노래를 불렀고, 기타는 연주자의 손이 떠올리는 대로의 말을 하염없이 떠들어댔으며, 평소엔 점잖던 더블베이스도 오늘만큼은 둘넷씩 짝을 지어 비틀거리고 있었다. 


  몇 명인가의 보컬이 가사 없는 스캣으로 목소리를 더했고, 그들을 중심으로 악기가 모이며 자연스러운 원형이 형성됐다. 나와 일행들은 그들의 안에서 어깨를 부딪히며 리듬을 즐겼다. 춤을 추는 우리를 보며 웃는 연주자들에게 나는 미소를 보냈다가, 또 약간 질투하기도 했다. 빼앗긴 적도, 빼앗아간 사람도 없는데 소중한 것을 빼앗긴 것처럼 서글픈 기분이었다. 


  ‘나는 그냥 연주하는 게 즐거웠던 거구나.’ 


  기타를 새로 사온 지 한 달이 지났다. 매일 적어도 한 시간씩은 연습하고 있지만, 손가락의 상태는 아무래도 이전만 하지 못하다. 아직 굳은살이 없는 왼손은 기타 줄에 눌려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마음이 급한 오른손은 박자를 놓치기 일쑤였다. 손끝의 관절과 뼈는 물론 나의 음악적 감각까지도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재활에 임하는 환자분들의 마음가짐처럼, 세상에 태어나 처음 익히는 동작처럼 하나하나 나의 것으로 만들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다시 연주가 즐거워질 때까지. 


  루틴을 계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끝에 그동안 익혔던 연습곡을 녹화하기로 했다. 밴드를 다시 시작할 여력은 없으니 유튜브에라도 연습의 성과를 기록하기로 한 것이다. 커버 영상 따위로 광고 수익이 발생할 일은 없겠으나, 한두 편을 올리고 나자 눈으로 보이는 결과가 나온 것 같은 뿌듯함 덕분에 다음 영상에 대한 동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알게 모르게 흘러가기만 했던 일상이 환기되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다리 위의 연주자들처럼 음악과 하나가 될 수 있겠지,라는 작은 희망과 함께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기 위한 연습을 한다. 아직 내게 남아 있는 것들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새삼스레 되새기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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