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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ng Juha May 29. 2021

엄마가 없는 아이들을 위한 책

프롤로그


생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다. 어렸을 적엔 내가 직접 생을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른이 되어보니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각자의 앞에 놓인 생이 우리 자신보다 앞서 우리를 끌어가고 있음을 눈치챈 건 아마도, 로맹 가리의 소설『자기 앞의 생』을 읽은 뒤였던 것 같다.  


나의 경우 인생의 진로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부모를 잃었다. 고아가 된 적은 없지만 그때부터 줄곧 흡사 고아와 비슷한 심정으로 살아왔다. 차라리 고아였으면 좋겠다고 수도 없이 생각할 만큼 괴로운 세월을 견뎌오다, 서른둘의 나이에 늦은 독립을 통해 비로소 괴로움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내 인생이 마치 장래희망란에 적은 대로 순탄하게 흘러갈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중학생이 된 지 2년째 되던 해 봄에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을 겪으면서 처음으로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했다.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결별 앞에 나는 하나의 인격이 아닌 부속물에 불과했다. 그 때부터 그 어디에도 내 편이 없는, 무척 외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나는 주변에 엄마가 있는 아이들을 보며 늘 부럽고 궁금했다. 엄마가 아침밥을 해주고 교복 블라우스를 다려주는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엄마랑 같이 주말에 쇼핑을 하는 아이들은 얼마나 좋을까. 사춘기를 지나며 혼자서 사러 가기 부끄럽게 여겨졌던 속옷이라든지, 생리대 따위를 엄마랑 같이 가서 고르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생의 중대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내 곁에는 가족이 없었다. 감사하게도 교회 선생님들이 많이 도와주셨지만, 대학 입시와 취업을 하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에 내겐 가족이 너무나도 필요했다. 나의 보호자인 아빠는 그저 내 선택을 비난하고 반대하거나, 돈 문제로 화를 내는 등 그저 자신의 연약함과 힘듦을 자식들에게 그대로 내 비춰 보일 뿐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아빠의 감정받이에 불과했다. 


삼십 대 후반이 된 지금은 아빠와 잘 지내지만, 만약 내가 서른둘에 집을 나오지 않았다면 그마저도 요원했을지도 모른다고 종종 생각한다. 가족과 함께 살면서 나는 정말 외롭고 공허했으며, 무엇보다도 가시 돋친 말들에 상처 받기 일수였기에 지금도 나는 이따금씩 생각한다. 훨씬 더 빨리 집을 나왔어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집을 나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나는 내 안에 켜켜이 쌓인 어둠을 신앙의 힘을 빌어 치유해야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글쓰기나 독서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삶에 일어났던 이해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들, 그중에서도 부모님의 결별 후 엄마를 이십 년 동안이나 만날 수 없었던 아이러니에 대해서 어떻게든 이해해보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사이에, 나는 어느덧 좋은 삶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혼자,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해내고 문제를 해결하는 삶에 익숙해졌고, 자녀의 입장이 아닌 부모 입장에서 내게 일어난 일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원망이 아닌 용서를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전에는 마침내 엄마에게 용기 내어 먼저 손을 내밀었고, 무려 이십 년 만에 엄마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엄마와 연락이 끊어졌던 이십 년의 공백은 누군가가 태어나 성인이 될 만큼 아주 기나긴 시간이고, 그 시간의 공백이 얼마나 크고 광활한지를, 나는 엄마와 만나서 시간을 보낼 때마다 느끼곤 한다. 피가 물보다 진한 건 맞지만 핏줄이라고 하여 당연히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님을 줄곧 느낀다. 불현듯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마다 사실 그러한 느낌에 조금은 상처를 받는다. 우리는 다시 가족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고 있다. 마치 헤어졌다 다시 만난 연인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여전히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간다. 


문득『엄마가 없는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는 제목의 책(혹은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 이유를 잘은 몰랐었는데 프롤로그를 쓰는 동안 깨닫고야 만다. 대체로 평온하며 소소한 행복을 발견해가며 살고 있는 나이지만, 내 안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가여운 아이가 이 글을 쓰는 동안 부스스 눈을 뜬다. 그 아이는 엄마와 가족의 사랑을 한없이 필요로 했고 누군가에게 자신이 겪었던 아픔과 슬픔을 털어놓았을 때 충분히 이해받고 싶어 한다고 느낀다. 그 아이는 여전히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야기했을 때 "너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을까 봐 속내를 꽁꽁 싸매고 있다. 이제는 그 아이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고 싶다. 그 아이가 겪은 아픔과 슬픔을 내가 이해한다고,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노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서 그 아이가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아이가 아닌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재잘거릴 수 있는 맑고 밝은 아이가 되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것만이 그 아이를 위한 구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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