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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립국 Apr 23. 2021

오늘의 서술, #32 힐링과 워라벨

#32 힐링과 워라벨


 힐링이라는 말을 남발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예전만큼 쓰지 않는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이다. 힐링이 뭔가 대단한 운동이거나 사회현상이었다면 달리 생각했겠지만, 평소 하던 휴가나 여행 등을 감성적으로 포장해 둔갑시킨 것 말고 딱히 새로운 점은 없다. 영화 쪽에서도 힐링 무비라는 이름까지 만들어 마케팅을 했더랬다. 대게 갈등이 해결되고 위로와 같이 말랑말랑한 것을 주는 내용의 작품들이 그렇다.

 

 여기저기서 힐링이 이야기되는 시기에 한병철의 책 "피로사회"가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현대사회의 성과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내용이다. 해야 한다 혹은 하지 마의 금지와 제한을 두는 규율 사회에서 “할 수 있다”라는 자유의 세계로 이행했다고 분석한다.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성과사회는 무한한 자유를 표방하지만, 목표한 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허덕이게 한다고 이야기한다. 누군가에게 채찍질을 당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채찍질을 하면서 왜 나는 안되지라며 자학한다. 그래서 우울이 생기고 피로해진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 사회에는 여전히 "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 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 피로사회, 한병철

 

  자본은 우울증 환자를 치료(힐링)해서 다시 챗바퀴를 돌리도록 보채야 한다. 여가 시간에 하는 많은 것들이 교양을 쌓거나 휴식을 취하면서 재충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생긴 피로와 우울을 치료(힐링)하는 수단이 되어버린 것. 힐링은 피로사회를 적나라게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면서, 교묘히 은폐하는 말이기도 하다. 워라벨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OECD 가입국 중 노동시간이 길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일하는 시간이 많은데 그것을 줄이려는 노력은 않고, 여가 시간을 더 알차게 쓰는 것에 집중한다. 힐링의 연장선에 있는 개념이라고 본다. 단어만 바뀌었을 뿐. 더군다나 여행으로 대표되는 힐링과 고상한 취미의 워라벨을 하려면 소비를 해야 한다. 기막힌 전략이지 않나.

 

 어떨 땐 박카스 한 병이 피로를 풀어주지만, 잠깐 풀릴 피로가 아니라 만성피로라면 다른 처방전이 필요하다. 힐링을 지나, 워라벨이 지나가면 또 다른 말이 피로사회를 지속시킬 것이다. 우울과 피로를 어르고 달래는 전략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계속될까. 시간이 걸리는 일이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과로와 우울에 지치기 전에 끝이 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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