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을 때 나갑니다.
2019.4.26
3708일 차, 오늘이 LG전자에 마지막 출근하는 날이다.
간혹 동료들이 퇴사한다며 당일날 오후쯤 메일을 보내오는데, 그런 연락을 받으면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보내는 게 늘 아쉬워서 나는 일주일 전에 동료들에게 나간다는 메일을 보냈다.
메일을 받은 사람들 중엔 어디 가냐며 캐묻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갈 데도 안 정하고 어디를 가', '밖은 더 전쟁터인 거 모르냐' 같은 시답잖은 말보다 역시 뱅미랭스럽다며 "백미진이니까 알아서 잘했겠지, 뭐 할지 결정 안 했다고 했지만 걱정 안 돼!" 같은 말을 해주어서 정말 기뻤다.
회사에서 함께했던 동료들에게 내가 그들의 여동생이나 보살펴야 할 사람이 아니고, 프로페셔널로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이 충만했다. 감사했다.
그저 나의 기우일지도 모르지만, 공교롭게도 2018년 1월부터 시작된 우리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퇴사자가 세 명 나왔다. 그래서 혹시라도 나의 퇴사가 프로젝트나 프로젝트 리더 탓으로 돌아가지 않을지 좀 걱정이 된다. 실제로 흔히 퇴사하는 이유가 직속 상사인 경우가 많으니 우리 프로젝트 리더도 그 부분에 대해 우려가 있을 거라 잠깐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마지막을 함께한 내 라인 매니저는 함께 일해보니 좋은 개발자였고, 여러 조직을 옮겨 다니는 동안 겪었던 조직책임자 중 손에 꼽을 만큼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에 대해 착하다거나 순하다는 표현을 쓰던데,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프로젝트에서 나의 역할은, 일이 돌아가지 않게 만드는 모든 크고 작은 것을 끊임없이 짚어주고 드러내어 문제로 공론화시켜 그걸 리더와 구성원이 함께 해결할 수 있게 돕는 사람이다. 다루는 문제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 해결을 위해 변화시켜야 하는 대상은 팀장급 이상이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일반적인 조직엔 없는 역할이기 때문에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오래 지내온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젊은 여성인 나를 차별할 때가 많다. 내게 전문성은 있지만 어떤 권한도 없기 때문에 내 눈에 비친 어떤 광경을 문제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인식에 따라 다양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지난 십 년간 보아왔다.
내가 함께 일해본 그는 프로젝트 멤버가 겪는 불편함을, 고충 사항을, 일이 안되게 하는 문제를 공론화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달랐다. 이전에 만난 조직책임자 중 대부분이 문제를 손에 들고 있는 게 부담스러워서 빨리 치워버리려고 했다면, 우리 프로젝트 리더와 리더십 그룹은 그렇지 않았다. 문제를 빨리 털고 싶긴 해도 그로 인해 프로젝트 멤버들이 겪을 어려움도 무시하지 않았다. 이슈를 빨리 털지 못해 본인 마음이 조금은, 며칠간 더 불편하더라도 그걸 구성원들에게 그대로 전가하지 않았고, 자신의 눈에 잘 보이지 않아 무심코 넘어갔던 부분을 짚어주면 더 잘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크다는 게 보였다.
문제를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영향받는 모두를 위해 개선하려고 함께 애쓰려는 사람을 착하다는 말이나 순하다는 말로 퉁치려고 하다니. 정말 맘에 들지 않았다.
내가 맨 처음 프로젝트에 조인해서 프로젝트 리더와 파트장들에게 했던 말이 있다. “제가 TV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아마 왜냐고 되물을 때가 많을 거예요. 그게 님들에게 도전하거나 간 보려고 그런 건 아니고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거니까 기분 나빠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는 파트장님들이랑 다른 역량을 다루는 사람이니까 저한테 빼갈 게 있으면 다 가져가세요. 다 드릴 수 있으니까-”
나와 같은 팀이 되기 전 이 사람들이 다른 팀의 동료들에겐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르지만 나와 함께 한 프로젝트 리더와 리더십 그룹은 이랬다.
다만 한 가지 짚어야 할 건, 사람마다 표현하는 방식이 서툴 수 있고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때로는 싸울 수도 있고 화를 낼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이 우리가 영영 다시 보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함께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꽤 오랫동안 조직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다 보니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결국엔 사람이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나와 내 동료들이 매일 일을 하려고 회사에 모이긴 하지만 그 일을 하는 건 결국 사람이라는 걸, 마지막 프로젝트를 함께한 동료들도 조금이나마 인지하게 돼서 매우 뿌듯하다. 아마도 이전에 퇴사한 내 동료들은, 회사가 그들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걸 잊고 그저 회사 일을 해야 하는 감정 없는 노동자로 보는 게 싫었던 게 아닐까.
우리가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려고 할 때 이 제품이 최초로 시작하게 된 지점엔 어떤 불편함을 느끼던 사용자가 있었다는 점을 빼놓고 만들면 누구도 원하지 않는 제품이 탄생하는 것처럼, 그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과정 또한 내부 고객인 동료들이 중심에 있다는 걸 내가 어디에서 무얼 하든 앞으로도 잊지 않아야겠다.
좋은 제품을 만들고 동료들이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엘지전자가 되길,
이제는 밖에서 응원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