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 비가시적인 것과 가시적인 것 그 사이 어딘가
작은 사람을 낳고 기르면서 육아 용품을 살 때마다 '고객은 누구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실제 사용하는 사람은 아기지만 물건을 고르는 사람은 엄마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제품을 만들 때 실제 사용하는 사람과 돈 내는 사람을 구분하는 표현으로 사용자와 고객이라고 칭하기도 했던 게 떠올랐다.
처음 이 글에 대한 글감을 떠올렸을 때의 제목이 "육아용품의 고객은 누구인가?"였다. 그 시작은 베이비룸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서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아기가 커가면서 짐이 점점 늘어나고 아기의 영역이 안방에서 거실을 침범하는 때가 오면 아무리 깔끔하고 미니멀하게 꾸며뒀던 거실도 온갖 색이 난무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비슷한 시기에 거실에 아기 전용 펜스인 베이비룸이라는 걸 쳐서 그 안에서 아기가 놀도록 하는데, 베이비룸을 고르는 과정이 "육아용품의 고객은 누구인가?"를 떠올리게 했다.
현재의 많은 엄마들이 인테리어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아기를 돌보길 원하기 때문에 최근에 나오는 베이비룸은 엄마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흰색, 아이보리색, 그레이색 등 무채색이고 아기의 감각에 도움이 될 어떠한 무늬나 인형 같은 것도 달려있질 않다. 우리 집 것도 그렇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기의 눈높이에 맞춘 제품들이 많았다. 알록달록한 조작 장난감이 붙어있고, 조립 패널 각각에 볼록하게 동물이 새겨져있기도 했다.
아기가 사용하는 용품에 나타나는 이러한 변화는 아마도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걸 반영하고 있을게다. 과거엔 아기가 태어난 가정에서 구성원 누구보다 좀 더 아기에 초점을 두었다면, 지금은 아기만큼 부모인 나의 삶도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 말이다.
이 선택에 대해서는 제삼자가 옳다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고객과 사용자가 나뉘는 상황에서 하는 선택에는 양쪽의 우선순위보다는 어느 한쪽의 우선순위만을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생기고, 그 둘의 우선순위는 서로 반대되기도 하는 듯하다. 그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하든 비가시적인 혹은 장기적인 트레이드오프가 생겨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 들어 글의 방향을 바꾸었다.
임신했을 때 가장 처음 이러한 고민을 하며 샀던 물건은 분유병(젖병)이었다.
플라스틱은 열이 가해지면 환경 호르몬이 나오기 때문이다.
성인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다양한 세균과 병균에 노출되어 있었으니 적당한 선에서 면역이 형성되어 있지만 갓 태어난 아기는 아니다. 때문에 몇 시간 간격으로 먹는 분유를 담아내는 분유병은 분유를 타는 물 온도, 최소 40도에서도 안전한 소재여야 했고, 분유마다 잘 녹는 온도가 달라 어떤 건 뜨거운 물에 녹인 후 식혀서 먹이기도 해야 해서 70도의 물에 타는 분유도 있다고 들었다. 이것뿐인가? 먹고 난 분유병은 깨끗이 닦아 소독을 해야 했다. 과거엔 열탕 소독밖에 방법이 없었지만 요즘엔 UV 소독기를 사용하는 일이 흔했다.
이는 곧 아기가 사용할 분유병을 사야 하는 엄마로서 고민할 것이 더 늘어났다는 뜻이다.
✅ 하루에 몇 번씩 사용하는거라 미세 플라스틱이 나오지 않는 소재
✅ 100도씨의 끓는 물에서도 환경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소재
✅ UV 소독기를 사용해도 환경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소재
환경 호르몬의 노출이 두려운 엄마들은 유리 분유병을 찾는다. 고열에도, UV 에도 안전하니 유리 소재보다 더 좋은 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 그럼 그냥 유리 분유병을 사서 쓰면 될까?
최소 돌 때까지는 사용해야 하는 분유병,
아기의 입장에서 보자.
아기는 이유식을 시작하기 전인 6개월 동안은 매일 분유만 먹는다. 100일 때까지는 밤낮없이 2-3시간 간격으로 먹다가 그 후에는 점점 4시간, 6시간 등 텀이 생기기 시작하며 횟수로 따지면 최소 8회로 시작하여 3회 정도로 줄어든다.
이번엔 아기에게 분유를 먹여야 하는 엄마의 입장에서 보자.
아기를 갓 낳은 엄마는 온몸의 관절이 벌어졌던 터라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다. 그래서 아기를 낳은 후 최소한 100일 동안은 몸조리를 매우 잘해야 이후가 조금이라도 편안하다. 그동안은 무거운 것도 들면 안 되고, 찬 바람도 쐬면 안 된다.
그러한 아기 엄마에게 하루에 최소 8회를 먹여야 하는 분유병은 어떤 광경을 연출하냐면,
유리로 된 분유병을 들고 그 안에 포트에 있는 끓여 식힌 물을 넣고, 분유를 타고,
뚜껑을 닫아 잘 흔들어 섞고 식힌 후,
한 손으로는 아기를 품에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기에게 분유병을 들고 먹여야 한다
이게 온몸이 성한 일반인에게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뼈마디가 벌어졌다 줄어드는 중인 갓 출산한 아기 엄마에게는 유리 분유병의 무게조차 참으로 버겁다. 때문에 플라스틱만큼 가볍게! 를 내세우며 더 얇게 만든 유리 분유병도 나오지만 어쩌다 한 번 쓰는 게 아니라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하고 세척하기 때문에 사용하다가 혹은 세척하다가 깨지는 일도 빈번하다. 내 아기의 입에 나도 모르는 새에 깨진 유리 조각이 들어갈 수 있다는 위험이 불안 요소가 된다.
이 정도 비교하고 나면 이젠 선택을 해야 한다. 이 또한 엄마의 입장과 아기의 입장으로 나뉜다.
✅ 엄마의 뼈마디를 위해 조금이라도 가벼운 플라스틱 소재냐, 조금 더 무거워서 엄마의 관절에 무리를 주고 잘 깨져서 여러 번 새로 사야 할 수도 있는 유리 소재냐
✅ 아기가 커가는 내내 몸의 여러 곳에 안 좋은 영향을 줄 미세플라스틱과 환경호르몬이 나올 수도 있는 플라스틱 소재냐, 현존하는 가장 무해한 소재인 유리 소재냐
난 그 사이에서 고민하며 여러 자료를 찾아보다가 실리콘 분유병과 PA소재 분유병을 샀다.
실리콘은 의료용으로도 사용하기 때문에 유리 분유병을 대체할 수 있는 소재 중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PA는 플라스틱의 한 종류이지만 고온과 UV에서 안전하다는 결과가 나와있었다. 미세플라스틱은... 사용하다가 미세한 흠집이 나면서 발생하는건데, 그냥 중간에 바꿔주는걸로 줄여보자고 생각했다.
헌데 소재만 고르면 끝이 아니었다. 같은 이유로 실리콘 분유병이 다양한 브랜드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실리콘은 물컹거리는 재질이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는 플라스틱이 반드시 들어갔다. 이는 단순히 실리콘으로 본체를 만들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여러가지를 따져 실리콘 분유병을 고른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실제로 분유를 빨아 마셔야 하는 아기의 입장으로 보아 아기의 입이 닿고, 아기가 마시는 분유물이 닿는 곳은 모두 실리콘이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이를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분유병의 각 결합 요소 어디에 어떤 소재가 쓰인 건지 자세히 나와있질 않았다. 그래서 베이비페어에 가서 분유병을 분해해 가며 한참을 물어보고 골랐다.
고작 분유병 하나를 고르는데 유난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뭐 어떤가? 내가 내 일에 유난 좀 떨겠다는데.
아기는 돌이 되기 전까지는 맞아야 할 예방 접종도 많고, 영유아 검진도 받으러 가기 때문에 병원에 갈 일이 종종 있다. 썸머는 다른 이슈로 병원을 한 번 옮기며 시에서 운영하는 종합병원에 다녔는데, 선생님 두 분이 계셨지만 한 분은 항상 대기가 한두 달씩 차있다고 했다. 왜냐고 물어보니 그분이 성조숙증 분야 전문이신데 요즘 성조숙증 환아들이 많아 예약이 꽉 차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이것이 플라스틱에서 나오는 환경호르몬과 무관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요즘 자폐 아동이 늘어나고 있다는데 이 또한 뇌가 자라는 기간에 미세 플라스틱에 과도하게 노출되어서 그렇다고 한다. 떠올려보니 아기들 장난감에 온통 플라스틱 투성이었다.
인간의 삶에 유용하지만 저렴한 비용으로 많은 물건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던 신소재 플라스틱이 참으로 다양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플라스틱을 쓰지 말아야지!!라는 다짐을 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당장 너무 편하기도 하고, 내 집에서 내가 안 쓴다고 해도 밖에서 계속 흘러들어오기 때문이다.
다만 아기와 우리 가족의 입에 들어가는 것을 담아내는 식기, 씻을 때 사용하는 샤워기, 아기가 매일 물고 빨며 노는 장난감 등 위험에 직접적으로 노출될 수 있는 제품들엔 좀 더 안전한 소재는 무엇일지 고민하고 찾아보며 고르고 있다.
물론 비싸다. 플라스틱을 기준으로 하면 많이 비싸다. 게다가 플라스틱만큼 예쁘지도 않다.
가시적인 것(비용, 심미성)과 비가시적인 것(안전) 사이의 트레이드오프가 가져오는 영향이란 게 뭘까?
당장 생각나는 건, 당장 내 눈을 즐겁게 하는 것과 임계치가 넘어야만 나타나는 각종 질병에의 노출이 아닐까.
실제로 열 살 정도 어린 지인이 자궁에 병이 생겨 수술을 받았다. 과거부터 쭉 되짚어보니 플라스틱 용기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물론 플라스틱 하나만이 원인은 아닐 테지만 가장 손쉽게 개선할 수 있는 게 플라스틱이지 않았나 싶어 안타까웠다.
나와 내 가족의 전 생애에 거쳐 영향을 주는 것은 보통 비가시적이다.
그리고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별거 아닌 걸로 치부하여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