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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 컷 일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취잿거리 1

실마리를 찾아서

by 반고

1월 말 월간지 발송을 앞두고 포장 작업을 돕기 위해 출판사로 나섰다. 같은 대전 안이라도 우리 집이 있는 유성구에서 출판사가 있는 동구까지는 왕복 두 시간이 걸린다. 길에 뿌린 시간을 되찾아보려고 나는 시내에 나간 김에 한꺼번에 일을 처리한다. 오늘은 3월의 취재지인 인흥상가아파트를 답사하기로 했다. 이곳은 쌀 전문 재래시장인 인동시장 안에 있는 대전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다. 흔히 주상복합아파트 하면 부와 세련됨의 상징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곳은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어서 혼선을 준다. 인흥상가아파트는 1970년대에 지어진 공동주택으로 인동시장은 그 기능이 많이 축소되었지만, 아파트는 건재하고 있다. 인터넷과 잡지에서 찾은 자료만으로는 감이 오지 않아서 본격적인 취재를 하기 전에 한번 가보기로 했다.


https://blog.naver.com/dee8dee/221365317509


오전 9시를 조금 넘긴 시각, 한 동으로 된 아파트에는 인적을 찾기 어려웠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출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주거지역을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상업지역의 점포는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사방으로 난 인흥상가아파트 출입구 중 하나로 들어섰다. 블로그 사진에서 본대로 건물 가운데가 뻥 뚫려 있다. 상점의 뒷문이지만 아파트의 앞문이기도 한 중앙 공간이다. 왠지 모르게 오래 머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잠시 서 있으려니 1층 식당에서 아파트 쪽으로 난 창문에서 취이이익, 타타타탁 경쾌한 소리가 들린다. 압력밥솥에서 추가 흔들리며 김빠지는 소리와 도마에 대고 칼질하는 소리가 주거니 받거니 한다. 이곳은 영화 촬영지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집장은 사람, 공간, 역사를 중심으로 인흥상가아파트와 인동시장을 자세히 살펴보자고 하였다. 짧은 시간 동안만 둘러보아서 인지, 이곳에서 무엇을 파악해야 하는지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편집장이 잡지 한 권을 통째로 할애할 만큼 큰 취재 가치를 느꼈던 곳인데 왜 내 눈에는 특별함이 보이지 않는지 고민이 되었다. 이 동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적어서일까? 기획 회의를 하면서 더 생각해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돌아섰다.


답사를 마치며 인흥상가아파트의 취재 방향에 대해 떠오른 생각은 다음과 같다.


*현장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구청 민원신청 기록에는 이곳에 경로당이 있다고 쓰여 있다. 경로당 이용자들을 인터뷰해도 좋을 것 같다.

=>코로나 시대라 어르신들 접촉하는 것이 불가능할 듯.

*1919년 대전 최초로 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3·16인동장터독립만세운동 장소를 취재해도 좋겠다. 매년 3월16일에 인동장터에서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3월호 취재는 2월 초에 해야 하는데, 행사는 3월 중순에 있으니 시기가 맞지 않음.

*주상복합단지 1층의 인흥해장국을 방문하여 종일 어떤 사람들이 오는지 관찰해도 좋겠다.

=>식당 취재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허락을 구할 수 있을지 막막.

*쌀시장인 인동시장의 상점을 방문해서, 곡식 담는 도구의 유래, 역사 등을 인터뷰한다.

=>사진 중심의 기사가 될 것 같은데, 이 방향이 괜찮은지 출판사에 문의해야 함.


인흥상가아파트를 떠나 대전천변을 따라 목척교 방향으로 이동했다. 일 킬로미터가 훌쩍 넘는 거리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인동시장을 벗어나자마자 보문교에서 인창교 사이 인도 난간에 설치된 '인동 독립 만세운동' 철제조형물을 만났다. 평소 같으면 난간에 붙어있어야 할 조형물이 하나씩 떼어져 바닥에 놓여 있었다. 현장을 지휘하는 사람 한 명과 용접하는 사람 한 명이 조형물 근처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지휘하는 사람은 내가 다가가자 공사에 대한 민원을 제기하는 줄 알고 방어적인 자세를 보였다. 무슨 공사인지 묻자 조명 공사인데 무조건 3·16 행사 전에는 끝날 거라고 하였다. 나는 명함을 전하며 인사를 하고 관심이 있어서 그러니 이 장면을 사진 찍고 싶다고 했다. 내 명함을 본 그는 월간 토마토를 알고 있다며 촬영을 허락했다. 향후 궁금한 점이 있을 때 연락드리고 싶다고 청하여 그의 연락처를 받은 후, 다시 출판사로 향했다.


인동시장 독립운동사진.jpg


시장 쪽에서 출판사 쪽으로 향해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보자면 사무실은 대각선 방향이라 건널목 신호등 한 번, 지하도 한번을 건너야 했다. 지하에 들어서면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기 일쑤인 나는 지상에서 이동할 수는 없는지 알아보려고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지하도를 피할 수 없는 것 같아 계단을 내려가려는 찰나, 길 건너에 시선을 사로잡는 건물을 보았다. 외벽 파사드를 대전 상징물 벽화로 꾸며놓은 대전트래블라운지였다.


대전트래블라운지.jpg


사무실에 거의 다 왔으니, 저기서 딱 10분만 있다 가야지 하며 대전트래블라운지에 들렸다. 대전트래블라운지는 2020년 가을에 생긴 따끈따끈한 공간으로 대전 여행자들을 위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볼 것, 마실 것, 살 것이 있는 근사한 공간이라 이번 봄에 1박 2일 여정으로 친정 식구들이 오시면 이곳에서 여행 일정을 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여행정보책자를 한 아름 받아들고 출판사로 갔다.


출판사 사무실은 잡지 제작 및 포장 작업으로 분주했다. 편집장에게 인동시장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고 했더니, 그곳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확 와 닿는 건 없었지만 면밀히 관찰해보면 괜찮을 것도 같다고 하였다. 오는 길에 본 조형물 작업 현장에 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편집장은 그사이 계획이 바뀌어서 3월호도 2월호처럼 흑백 종합지 형식으로 나간다며 인흥상가아파트 편은 추후 칼라인쇄를 할 때 싣겠다고 하였다.


기자 모두가 깊이 있게 인동시장을 취재하려던 일정과 달리 종합지 성격에 맞는 각자만의 취재 장소를 빠르게 찾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편집장에게 방금 다녀온 대전트래블라운지에 대해 소개하며, 대전을 잘 모르는 사람은 물론이고, 대전 사람들에게도 시내의 오아시스가 되어 줄 곳 같다고 하였다. 편집장은 그곳에 관한 소식은 들었지만, 가보지는 않았다며, 3월호 취재지로 좋겠다고 했다. 월간 토마토 2월호 포장작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서 대전트래블라운지에 들려 인터뷰 섭외를 했다. 답사를 마친 인동시장 취재 건은 반나절 사이에 날아가고, 생각지도 않았던 대전트래블라운지가 새로 선정되었다.


<이 글은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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