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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 컷 일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취잿거리 2

글감을 찾아서

by 반고

대전트래블라운지에서 가져온 여행 자료 중에 만화책이 한 권 있었다. 한국관광공사가 펴낸<웹툰 보며 떠나는 대전·공주·부여 여행>이라는 책인데, 그림책이라 그런지 팸플릿 더미 속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이 책에서 공주 편을 읽다가 유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공주시 유구읍의 섬유역사전시관은 80년 이상 섬유 제조에 종사한 이 마을의 역사를 모아놓은 곳이다. 인근에 직물의 메카였던 지역이 있다는 점도 흥미로왔지만, 유구벽화마을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공장 벽면을 도화지 삼아 실을 매만지고 있는 할머니기술자를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호소력는 동시에 애잔함도 있어서 실제로 가보고 싶은 마음을 일으켰다. 봄이 되면 나들이 삼아 유구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회가 일찍 찾아왔다.


프래린서 기자들이 저마다 3월 취잿거리를 정하고 기사를 작성 중이던 어느 날 편집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대전트래블라운지 기사 외에 하나 더 써달라는 요청이었는데, 이번에는 주제를 정해주었다. 바로 지난 1월 인동장터에서 만세운동 철제 조형물을 보수 중이던 작가였다. 시간관계상 기사 작성이 2월 초에 이루어져야 하니 3월에 열리는 만세운동 재현행사를 취재할 수는 없겠지만, 그 조형물을 설계한 작가를 만나서 작품을 만들게 된 배경을 들어보라는 주문이었다. 3월호이니 3.16 만세운동 관련 이야기를 실으면 적절한 테마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인터뷰 요청을 하기 위해 전화번호를 받아두었던 사람에게 연락했다가 의외의 답변을 들었다. 그는 해당 디자인을 설계한 작가가 아니며 본인은 조형물 주변 환경 정비를 의뢰받아 조명설치 작업을 하였을 뿐이라고 하였다. 오 년 전 이 작품을 만든 작가는 대전지역 미술대학의 교수라고 들었는데,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말하였다.


작품에 대한 정보도 찾을 수 없고, 몇 년 전 이 조형물을 소개한 지역신문 기사에도 작품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점을 기사화하기도 했다. 명확한 취재대상을 모르는 상태라, 이 아이템을 취재하려면 구청에 문의하거나 대전지역 대학의 조형미술학과에 연락해 보는 것이 실마리가 될 듯했다. 곧 설이 다가오고 있고 특히 2월은 날수가 적은 달이라 없는 정보를 찾아서 취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편집장에게 이 문제를 상의했더니 정보를 캐느라 너무 많은 수고를 들이지 말고 다른 계획으로 수정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다음 날 나는 다섯 개의 취재 후보지를 추려 편집장에게 전달했다. 월간 토마토는 대전의 문화예술잡지이지만, 대전 인근 도시도 우리 잡지의 관심사여서 나는 내심 유구읍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편집장은 내 목록을 보더니 유구섬유역사전시관을 일 순위로 골랐다. 예전에 편집장 자신이 취재하려고 했었는데 못 간 곳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설날 연휴 하루 전날 유구로 향했다. 유구섬유역사전시관은 아담한 규모의 전시홀이었는데, 나를 안내한 유구전통시장상인회 회장은 전시관은 살아 움직이는 게 아니라 생동감이 없으니, 현재 가동 중인 공장을 견학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자리에서 몇 십 년째 운영 중인 섬유공장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고 하였다. 상인회장은 나를 옆에 두고 인근 공장 관계자에게 전화해서 대전에서 온 기자를 데리고 가도 되는지 물었는데, 그 대화가 마치 삼촌과 조카 사이의 대화처럼 허물없이 느껴졌다.


상인회장은 실제 공정을 한번 보면 직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금세 이해할 수 있다며 나를 데려 갔고, 나는 공장에서 누군가를 만나서 <공간과 사람>코너의 ‘사람’으로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따라나섰다. 그런데 계획에도 없이 우연히 찾아간 직물공장이 정말로 엄청난 문화와 역사를 가진 보물 창고였다. 이곳은 4대째 대를 이어 실크를 만들고 있는 제직전문업체로, 한복을 만들 때 쓰는 원단 생산을 책임지고 있는 곳이었다. 유구섬유역사박물관 기사의 한 꼭지로 이곳을 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기도 하고, 이 업체가 쌓아놓은 역사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또한, 직조기술에 대한 용어도 생소하여 사전 조사를 하고 와야지 이해할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공장 견학을 시켜준 담당자에게 오늘은 한번 보고 가는 정도로 하고 편집장에게 허락을 구해 단독 기사로 쓸 수 있게 추진해보겠다고, 꼭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보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기사 작성을 마치고 편집장에게 유구 취재 후일담을 들려주었다. 상황설명과 함께 공장 내부 사진 몇 장을 첨부했더니, 편집장은 관심을 보이며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보겠다고 하였다. 월간 토마토에 합류하고 제일 처음 다루었던 기사가 30년 이상 된 상점을 인터뷰하는 것이었는데, 여기는 60년도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업소이니 월간 토마토가 관심 가질만한 곳이구나 싶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유구에 출장 갈 일이 생길 것 같아 벌써 마음이 뿌듯하다.


다음 달 기사는 마감했지만 2022년 봄 취재를 위해 3월16일에 열리는 인동시장 만세운동 재현행사에 가볼 예정이다. 코로나-19로 행사 규모가 크지는 않겠지만, 현장에 모인 사람들을 통해 해당 조형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년에 이곳에 대한 기사를 쓴다면 어떨지 알아내기 위해 사전답사를 하는 셈 치고 다음번 시내 나가는 날을 3월16일로 잡았다.


월간 토마토의 프리랜서 기자 활동을 시작한 후로 나에게는 주변에 대한 관심이 대폭 늘어났다. 우리 동네와, 대전, 대전 인근 지역의 소식을 꼼꼼하게 챙겨보고, 도서관이나 관공서에 비치된 안내 책자를 꼭 챙겨온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콘텐츠가 있는 곳은 널리 소개하고자 열심히 자료를 모았더니 기자생활 5개월 만에 자료가 그득하게 쌓였다. 취재할지도 모르니까, 취재를 다녀왔으니까, 취재지 인근 정보니까, 새로 나온 지도니까, 옛날 지도니까, 자세한 지도니까, 들고 다니기 편한 지도니까 하며 갖은 구한 지도가 늘어난다. 더 많이 쌓이기 전에 글로 쓰거나 디지털 자료로 전환하며 자료 정리를 계속해 나가려고 한다.


우연히 들른 트래블라운지에서 유구섬유전시관을 알게 되고, 유구에서 60년 된 장인 기업을 알았으며, 1년에 한 번 열리는 행사의 내년 기사를 위해 올해 행사가 열릴 때 답사 하는 일정을 알기까지, 취잿거리를 찾는 여정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찌 보면 내가 탐색하는 삶을 누릴 수 있는 까닭은 한 달에 한두 번 적정 분량의 원고를 소화하면 되는 프리랜서 기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유를 가지고 다양한 소재에 관심을 가졌다가 제일 적당한 소재를 뽑아 쓸 수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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