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토마토 2월호에는 ‘문화예술 두런두런’이라는 코너가 있다. 대전·충청 지역의 문화행사 및 예술전시 안내 모음이다. 나는 예전에 미디어 자원봉사를 했던 인연으로 국립세종도서관에서 세종미술협회 기획초대전 <<미소 한 아름>> 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출판사에 도움이 될까 하여 이 정보를 전달했더니 해당 전시회 안내를 '문화예술 두런두런'에 포함하겠다고 하였다. 더불어 편집장은 대전시립미술관에서 하는 ‘넥스트코드전’을 알려주었다. 대전지역의 청년작가를 발굴하는 전시인데, 참여 작가 중 한 명을 인터뷰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미술관에 가서 전시를 둘러보며 이곳에 작품을 출품한 작가 중 민보라를 인터뷰하기로 정했다. 한국화에 LED를 접목하여 자신만의 화풍을 추구한 점이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작품은 주로 오래된 도시의 밤 풍경을 그린 것으로, 보고 있으면 마치 시간여행을 떠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민 작가의 그림이 걸린 전시실에 머물며 여러 각도에서 작품을 감상했다. 중앙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을 적어보았다.
그림 감상을 좋아하지만, 화가 인터뷰는 처음이라 어떻게 진행할지 막막했다. 예술가는 내가 알아듣기 어려운 심오한 말을 많이 하지 않을까, 내가 너무 세속적인 질문을 던져서 예의 없다고 느끼지는 않을까 등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업무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가까이 지내는 예술가가 별로 없다는 점도 나의 두려움을 키웠을 것이다. 그러나 편집장의 미션을 잘 수행하고 싶은 마음과 문화예술 잡지의 취재 기자답게 그림 관련 기사 콘텐츠를 쌓고 싶은 마음이 합쳐져 일에 추진력이 생겼다.
작가는 자택의 방 한 개를 작업실로 쓰고 있어서 그곳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작가의 공간을 방문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최근 작품이 모두 전시 중이라 제작중인 작품을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미술관에 전시된 대형작품과는 다른 가정집에 걸기 적당한 크기의 그림을 만나 볼 수 있었다. 우리 집에 걸고 싶은 따스하고 정감있는 작품들이었다.
제품을 만드는 회사였다면 정보 수집 차원에서 가격을 물어보았을 텐데, 화가에게 작품의 금액을 묻는 게 실례인 것 같아서 그러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미술관에 걸린 작품에도 금액이 적혀있지 않았다. 갤러리의 작품은 판매용이고 미술관의 작품은 감상용인가? 문득 작품을 구매하고 싶은 사람은 어떻게 정보를 얻는지 궁금해졌다. 예술품 애호가로서의 나는 작품의 판매가를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취재기자로서의 나는 선뜻 그러지 못했다. 미술가를 취재하면서 특별한 잣대를 적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취재 부담을 안고 갔던 것과 달리 인터뷰는 잘 진행되었다. 작가의 이야기가 조리있었고, 준비해간 질문에 답변을 잘 해주어서 마무리할 때쯤에는 내 머릿속에 기사의 소제목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좋은 신호였다! 그중에 하나는 그녀가 몇 번 언급한 ‘전업 작가가 되면...’ 이라는 표현이었다. 내가 보기에 민보라는 이미 성공한 전업 작가인데, 그녀의 정의대로라면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대부분의 젊은 예술가들이 직업을 두세 개씩 가지고, 생계유지를 위한 활동과 작품에 전념하는 시간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로 예술가의 삶이 힘들어졌다고 하는데, 실은 전염병 이전에도 워낙 고생스러웠기 때문에 특별히 더 힘들어졌다고 말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미술가를 인터뷰하러 왔다가 청년예술가의 현실과 자기 길을 우직하게 가는 이들의 고단한 삶에 대해서 듣게 될지는 몰랐다. 그녀는 취미미술반 수강생을 가르치기도 하고, 미대지망생들의 멘토가 되어주는 일 사이사이에 긴 호흡으로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자 애쓰고 있었다.
나는 글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글로 돈을 벌지 못하기에 그녀의 설명에 깊이 공감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것과 지금 먹고살기 위해 해야만 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 둘 다 경험하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의 차이점도 알게 되었다. 글 쓰는 작가와 그림 그리는 작가, 둘 다 작가의 인건비(?)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들어가는 비용이 달랐다. 글 쓰는 데는 목돈이 들지 않지만,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미술 재료비와 표구비 등 돈이 많이 든다. 그러니 그녀가 ‘전업 작가가 되면’이란 말을 쓴 것은, 그림을 그려서 먹고살 수 있을 때가 오면 이라는 뜻을 내포한 것이었다.
나는 작년에 책을 한 권 냈고, 앞으로도 한 해에 한 권씩 책을 낼 계획을 세웠다. 여기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책이 잘 팔리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날이 내게도 올까? 오지 않는다고 해서 쓰지 않을 것은 아니니 걱정을 뒤로 물리고 쓰는 동안 그저 즐겁게 쓰자고 마음을 다독인다. 민보라 작가도 비슷한 말을 했다. 좋아하는 걸 열심히 해보는 방법 말고는 다른 길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작품을 대하는 화가의 마음과 글을 대하는 작가의 마음이 비슷한 것 같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취재였다.
잡지가 만들어지고 독자들이 내 글을 어떻게 읽었는지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드물다. 독자들이 피드백을 주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월간 토마토 2월호를 받아본 민보라 작가의 반응이 반가웠다. 글을 예쁘게 써주어 감사하다고 했다. 전시장에서 마주한 그녀의 작품이 진심으로 좋았고,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며 묵묵히 정진하고 있는 민 작가를 응원해 줄 수 있는 길은 애정을 담아 기사를 쓰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인터뷰 중에 영향을 받은 인물로 포르투갈의 문인 페르난도 페소아를 언급했다. 나는 페소아의 글을 읽어보지 않았기에, 집에 돌아와 도서관 대출예약도서 리스트에 몇 권의 책을 추가했다. 민보라 작가는 작품과 인터뷰를 통해 이미 나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