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라는
국가의 창세기 신화에 관한 성찰(1)

역사이야기 > 이용기의 한국근현대사 다시보기 ④

>>이용기(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1. 한국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큰 피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던 비극적 사건이기 때문에 한국현대사를 바라볼 때 마땅히 깊이 반추해야 할 대목이다. 우리는 통상 한국전쟁을 ‘6·25’와 연관시켜 이름 붙인다. 비록 ‘6·25사변’에서 ‘6·25전쟁’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6·25’는 전쟁이 발발한 그 날짜를 지시하는 것인데, ‘3·1운동’이나 ‘4·19혁명’처럼 특정한 사건이 발생한 날짜를 가지고 그 사건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6·25’라는 명명법은 한국전쟁의 이해에서 나름 독특한 맥락을 갖고 있다. 즉 ‘6·25’는 개전(開戰) 일자 그 자체보다는 개전 ‘주체’를 특화하려는 의도와 연관된다. 전쟁 발발 당시부터 남과 북은 상대방의 일방적이고 기습적인 침략에 의해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전쟁이 가져온 모든 고통, 피해, 과오는 전쟁을 도발한 상대측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오해가 없도록(?) 미리 말하자면, 한국전쟁은 북한의 전면적인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남침’이 분명하다.1) 따라서 전쟁을 도발한 북한의 역사적 책임은 엄중하게 물어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남북이 지금까지도 한국전쟁의 모든 기억을 환원시키곤 하는 ‘개전 책임론’에는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가 있다.


1) 몇 해 전에 누군가는 학생들 중에 한국전쟁이 북침에 의한 것으로 아는 경우도 있다며, 이는 역사교육이 좌편향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한에서는 어느 역사학자나 역사교사도 한국전쟁을 북침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위와 같은 주장이 사실인지도 의심스럽지만, 혹시라도 한국전쟁을 ‘북침’으로 이해하는 학생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은 ‘북침’의 뜻을 ‘북한을 향한 침략’이 아니라 ‘북한의 침략’으로 오해해서 생겨난 해프닝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역사교육의 좌편향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라 역사교육 현장을 향한 일부 세력의 전형적인 데마고기라고 할 수 있겠다.



첫째, 과연 한국전쟁은 어느 기습을 당한 쪽이 전혀 의도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돌발적인 사건이었는가? 1948년 여름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된 이후 남북 양측은 자신만이 전민족적 대표성을 가진 유일한 합법·정통 정부라고 자임하였으며(중앙정부론), 상대방을 하나의 정치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고 힘을 통해서라도 없애버려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괴뢰정부론). 또 남북은 각각 ‘북진통일’과 ‘국토완정’(또는 ‘남조선해방’)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공공연하게 무력통일을 주장했고, 그 결과 1949년에 38선에서 수많은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이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비록 38선 충돌이 곧바로 전면 전쟁으로 비화한 것은 아니지만, 남북의 두 정부는 출발부터 상대방에 대한 극한의 적개심을 표출하였고, 전쟁을 불사하는 무력통일을 말로써만이 아니라 일정 수준에서 현실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개전 주체의 역사적 책임 문제와는 별도로 남북 쌍방이 이에 대해 겸허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2)


2)이상에서 언급한 ‘중앙정부론 →괴뢰정부론 → 무력통일론 → 38선 분쟁’이라는 일련의 연쇄 과정에 관해서는 이용기, 2019, 「정부 수립 전후 남과 북의 ‘중앙정부론’」, <역사교육> 128 참조.



둘째, 전쟁의 와중에 일어난 모든 고통과 피해는 전쟁을 도발한 자가 져야 하고 기습을 당한 측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가? 북진통일을 호언장담하다가 북한의 기습에 속수무책이었던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널리 알려진 다수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포함하여, 한강교 폭파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부산정치파동 등 전쟁 동안에 벌어진 남한 정부의 수많은 과오를 단지 전쟁이라는 상황 논리나 먼저 총을 쏜 자의 책임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이 점은 북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남북의 국가권력은 오랫동안 민중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전쟁에 관한 기억을 독점해 왔다. 남한의 경우라면 ‘북한공산괴뢰집단에 의한 불법적 기습남침’과 ‘북괴에 의한 무자비한 양민학살’이라는 공식만을 강요하고, 그에 배치되는 일체의 기억을 금압하였다. 또한 남북 모두 걸핏하면 전쟁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지 않으면 상대방이 또 쳐들어올지 모른다’고 외쳐댐으로써 한국전쟁을 억압적인 권력의 유지를 위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왔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단지 먼저 총을 쏜 자가 누구인지 가려내어 그 모든 고통의 책임을 그쪽에 전가하면 그만인 그런 간단한 사건이 아니다. 전쟁 도발의 책임 문제를 넘어서, 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입었던 고통과 피해를 직시하고, 왜 그러한 비극이 발생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에 의한 기억의 독점과 침묵의 강요를 깨뜨리고 민중의 전쟁 경험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3)


3)주로 전쟁의 발발에 초점을 맞추던 한국전쟁 연구는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2000년에 김동춘의 저서 <전쟁과 사회-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돌베개)가 발간되면서 전쟁의 피해 당사자인 한국 민중의 경험으로 연구 지평을 넓혔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구술사 방법을 활용하여 민중의 전쟁 경험을 연구하는 경향이 강해졌으며, 최근에는 가족과 친족이라는 인간의 일차적 관계망 차원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연구(권헌익, 정소영 역, 2020, <전쟁과 가족-가족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 창비)도 나왔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민중이 희생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변으로 우리가 흔히 듣는 바는 한국전쟁이 극단적인 이념 대립에 따른 이데올로기 전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 전쟁이었을까? 국가 또는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민중 차원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 대다수의 한반도 주민은 비록 분단 상황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력을 통해서 분단 상태를 해소하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또 이들은 남북의 정권이 각기 추구하는 어느 하나의 이념이나 국가 체제를 일방적으로 지지하거나 그에 대한 배타적인 소속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다소 단순화하여 말한다면, 한국전쟁 무렵에 다수의 민중은 이념의 과잉이 아니라 이념의 부재 내지 무관심 상태에 있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민중은 전쟁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 남북의 두 국가는 특정한 이념이나 국가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던 민중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절대적·배타적 충성심을 갖는 ‘국민’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요컨대 한국전쟁은 국가에 의한 폭력적인 방식의 ‘국민 만들기’ 과정이었으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탈식민국가의 무시무시한 창세기 신화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전쟁을 바라볼 때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제 모습을 갖추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폭력성을 직시함으로써 과연 국가란 무엇이며 국가와 국민(민중)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성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결코 대한민국에 대한 반감을 형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근대 국민국가에 내재된 폭력성을 인식하고 바람직한 국가상을 만들어나가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한국전쟁 기간에 폭력적인 방식으로 형성된 국가와 민중의 관계는, 짧게는 개전 직후부터 서울이 북측의 수중에 들어가기까지 3일 동안, 길게 보아도 ‘인공 치하’를 겪은 뒤 국군에 의한 ‘수복’이 이루어지는 3달 동안 국가가 보여준 태도를 통해 그 핵심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남북 어디에도 일방적 지지나 배타적 소속감을 갖고 있지 않던 민중이 전쟁을 통해 어느 한 쪽에 절대적인 충성심을 갖는 국민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역시 이 기간의 민중 경험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2. 국민을 저버린 무책임한 국가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은 이제까지의 호언장담과 달리 별다른 저항도 못한 채 물러나기 시작했고, 38선에 걸쳐 있던 방어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전쟁 발발 직후 국방장관은 방송을 통해 “적은 목하 우리 국군부대의 용감한 작전 아래 38 이북으로 격퇴 혹은 섬멸할 운명에 있다.”면서 “국민은 직장을 사수하라.”고 천명했다. 국방부는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하기 전까지 줄곧 ‘국군 정예부대 북진’이라느니 ‘38선을 돌파하여 해주를 점령했다’느니 사실과는 전혀 다른 발표를 계속했다. 하지만 전선의 소문이 속속 후방으로 날아들면서 시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에 국회는 26일 밤 비상회의를 소집하여 정부 측의 상황 보고를 듣고선 정세를 낙관적으로 인식했는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결의안을 채택하여 시민들을 안심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에 이승만은 주한 미국대사 무쵸를 만나 대전으로 피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무쵸는 정부가 서울을 떠나면 사기가 떨어질 것이라고 반대했지만, 이승만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27일 새벽 1시경 국무회의는 정부의 수원 이전을 결정하였으며, 이승만은 동트기도 전에 슬그머니 서울을 빠져나갔다. 당시 무쵸가 본국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정부는 일본에 ‘망명정부’를 세울 수 있는지 문의할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27일 공보처는 정부의 후퇴 계획을 부인하고 ‘서울 사수’를 공언하면서 “일반 국민은 정부와 군경을 신뢰하고 추호도 동요치 말기를 바라는 바이다.”라는 특별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날 밤 10시경 이승만은 처음으로 국민들을 향해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방송하였다. 전쟁 발발 이후 60시간을 훌쩍 넘긴 시점에 방송된 대통령의 연설은 마치 서울에서 발표되는 듯했지만, 실은 이승만이 대전에 도착한 뒤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연설이 나온 뒤 몇 시간도 안 되서 인민군이 서울로 진입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28일 새벽 2시 반 무렵 군은 수많은 인파가 지나가고 있던 한강교를 폭파하여 커다란 인명 피해를 낳았다. 이로써 정부의 말을 믿고 가정과 일터를 지키던 서울 시민들은 이른바 ‘인공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전쟁 발발 직후 3일 동안 일어났던 이와 같은 상황은 향후 한국전쟁 기간 내내 국가가 국민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예고편과도 같았다. 전쟁이 터진 뒤 국가는 시종일관 국민에게 진실을 감추고 전황이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느니 정부는 서울을 사수하겠다느니 외치면서 ‘국민을 기만하는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이는 단순히 불리한 상황을 국민에게 알림으로써 동요를 막으려는 차원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전쟁이라는 비상상황을 맞은 국가라면 국민의 지혜와 힘을 결집하여 상대방에 맞서야 마땅할 텐데 오히려 국가는 국민이 진실을 알면 통제 불능의 상황에 처하거나 심지어 자신의 안위에 위해를 가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말하자면 ‘국민을 믿지 못하는 국가’의 모습을 보인 셈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정부의 발표만 믿고 일터를 지키던 국민을 ‘적’에게 넘겨주고 비밀리에 대통령을 비롯한 극소수 지도부만 피신해버림으로써 ‘국민을 저버린 국가’가 되었다. 개전 3일 만에 민중은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3. 개전 직후 민중의 전쟁 경험


통상 민중은 자신의 기록을 잘 남기지 않기 때문에 전쟁 동안에 민중이 어떠한 생각과 행동을 했는지를 알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런데 다행히도 서울대 사학과 교수 김성칠과, 같은 학교 국문과 2학년생 강신항이 전쟁 기간 동안 거의 매일 꼼꼼하게 기록한 일기가 남아 있다.4)


4) 김성칠, 1993, <역사 앞에서-한 사학자의 6·25일기>, 창작과비평사; 강신항, 1995, <어느 국어학도의 젊은 날 Ⅰ-6·25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일출판사. 김성칠은 1913년에 경북 영천에서 출생하여 일제시기 대구고보 재학중 독서회 사건으로 1년간 복역하였다. 해방후 서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전쟁을 맞이하였으며, 1951년 1월 괴한의 저격으로 사망하였다. 강신항은 1930년 아산 출생으로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2학년 재학중에 전쟁을 맞았다. 그는 당시 서울대 학도호국단 문화선전부 편집반원을 맡고 있었다. 평생을 훈민정음 연구 등 국어학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성균관대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은퇴하였다.



이들 자료는 비록 인텔리의 기록이지만 자신의 생각과 주위의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적어놓았기 때문에, 저자의 성향을 고려하여 읽어보면 민중의 전쟁 경험을 어느 정도 더듬어볼 수 있다. 중도 성향의 김성칠은 당시 주변 상황을 중립적 입장에서 담담하게 서술하였으며, 그의 일기에는 평범한 민중의 생각이 나름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반면 다소 우파 성향인 강신항은 자신의 이념적 지향을 강하게 드러내지만, 오히려 거슬러 읽기를 통해 당시의 정황을 비판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흥미롭게도 이 둘은 전쟁이 발발하던 날 김성칠 교수의 집에 같이 있었다. 이들은 평소 ‘지명연구회’ 활동 등을 같이 하며 깊은 학문적·인간적 교분을 나누던 사이였다. 하지만 중도 성향의 지식인 김성칠과 우파 성향의 대학생 강신항의 전쟁 체험은 때로는 비슷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날카로운 대비를 보였다.


김성칠은 6월 25일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서는 “마(魔)의 38선에서 항상 되풀이하는 충돌의 한 토막인지” 아니면 “대규모의 침공인지 알 수 없으나” 분위기를 보아 “사태는 비상한 것이 아닌가 싶다.”고 짐작했다. 혼란스럽던 26일과 27일에는 정부의 낙관적인 발표와 그에 대한 의구심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시시각각으로 더해가는 주위의 혼란과 흥분과는 딴판으로 신문 보도는 자못 자신만만하게 “적의 전면적 패주”라느니 “국군의 일부 해주시에 돌입”이라느니 “동해안 전선에서 적의 2개 부대가 투항”이라느니 하는 낙관적인 소식들을 전하여주고 있다. (1950.6.26.)

라디오를 틀어놓으니 대한민국 공보처 발표라 하고 아침에 수원으로 천도 운운한 것은 오보이고,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있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중이니 국민과 군은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고 거듭 외치었다. 그러나 자꾸만 가까워지는 총포성은 무엇을 의미함일까? (중략) 이 어려운 시절 막다른 판국에 있어서 국가의 공식 발표를 믿지 못하는 내 마음이 슬펐다. (1950.6.27.)


김성칠은 주변 상황을 볼 때 정부의 낙관적인 보도를 믿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그러한 자신의 모습에 슬퍼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의 공식 발표를 믿지 못하는” 김성칠이 아니라, 이처럼 선하고 자성적인 시민을 믿지 못하는 국가의 태도에서 슬픔을 느끼게 된다.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는 “5년 동안 민족의 넋을 가위 누르던 동족상잔이 마침내 오고야마는구나”라고 탄식하며 “길이 팽팽 돌고 눈앞이 깜깜하여졌”던 김성칠은 28일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한 날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 지긋지긋하던 포성이 그치어 사람들의 얼굴엔 이제야 겨우 살았다는 안도감이 역력히 나타나 보이나, 밤사이 세상은 아주 뒤집히고야 만 것이다. 우리는 좋든 싫든 하룻밤 사이에 대한민국 아닌 딴 나라 백성이 되고 만 것이다. (중략) 그들(인민군: 필자주)은 비록 억센 서북 사투리를 쓰긴 하나 우리와 언어·풍속·혈통을 같이하는 동족이고 보매 어쩐지 적병이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디 멀리 집 나갔던 형제가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오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그들이 상냥하게 웃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적개심이 우러나지 않는다. 이건 내가 유독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이 적기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어제 본 국군과 이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중략) 서로 얼싸안고 형이야 아우야 해야 할 처지에 있는 그들이 오늘날 누굴 위하여 무엇 때문에 싸우는 것이냐. 나는 길바닥에 털퍽 주저앉아서 땅을 치고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1950.6.28.)


서울 시민들은 인민군의 입성을 보면서도 거부나 환영 어느 쪽을 선택하기보다는 포성이 멈춘 것을 보고 “이제야 겨우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심지어 김성칠은 인민군을 보면서도 “적병이란 생각”이나 “적개심”을 느끼지 않고 “우리와 언어·풍속·혈통을 같이하는 동족”이자 “멀리 집 나갔던 형제”가 돌아온 것처럼 느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대한민국이 아닌 딴 나라 백성이 되고 만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도, 같은 동족끼리의 전쟁을 “땅을 치고 통곡하고 싶은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남과 북 어디에도 배타적인 정체성을 느끼지 않고 있던 김성칠은 자신의 이러한 태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나는 본시 대한민국에 그리 충성된 백성이 아니었다. 그의 해나가는 일이 일마다 올바르지 못한 것 같고, 그의 되어가는 품이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아서 언제든 한번은 인민공화국 백성이 되지 않을 수 없는 날이 오려니 하고 예견하였었다. (중략) 그러면 인민공화국에 대해선 각별한 향념(向念)을 품었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1950.9.16.)


김성칠은 대한민국이 영 미덥지 않아 이러다간 오래 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인민공화국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올 때 도피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는 인민군 점령 아래 놓인 직후에 “무력한 백성들만 속여서 남겨두고 저희들끼리 도망간 대한민국에 굳이 충성을 세우려는 건 아니”라고 남측을 비판하면서도, “세상이 갑자기 뒤엎이고 보니 우리처럼 행동이 굼뜬 축들은 새 나라 백성 되기가 무척 힘들”다며 ‘인공’ 통치를 냉소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일기의 표현처럼 김성칠이 “유독 대한민국에 충성심이 적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고, 당시 보편적인 정서였던 것으로 보인다.5) 대부분의 시민들이 인민군의 진입에도 남쪽으로 피난을 가지 않았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5) 전쟁 발발 당시 서울대 법대 4학년생이었고 서울 수복 이후 한국군 통역장교로 복무했던 박찬웅은 무당파적인 청년임에도 인민군 입성 당일 일기에 다음과 같은 소감을 적었다. “나는 인민군의 진주에 대해서 감사도 안 하고 폭력적 정변에 대해서 감격도 안 한다. 그러나 그간 갖은 고문을 당하고 갖은 모욕을 받고 사상범으로서가 아니라 살인방화의 죄명으로 투옥돼 있던 다수의 관제 빨갱이들-공산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근래에는 자유주의자는 물론, 이승만과 똑같은 우익의 김구 계통의 정치인 사상가 실천주의자들까지 ‘반정부는 반국가’라는 구실 하에 투옥되고 있다-의 출옥에 대해 그 사상을 초월해서 인간적 견지에서 마음으로부터 축하를 보낸다.”(박찬웅, 1990, <6·25일지-어느 대학생의 기록>, 지식산업사, 19~20쪽)



그러나 물론 모두가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전쟁 발발 한 해 전 8월 15일에 “대한민국, 날로 융성하는 가운데에도 실지(失地) 회복이란 적지 않은 대과업이 앞에 가로놓여 있는 이 마당에” “독립 1주년, 해방 4주년을 맞이하여” “오로지 앞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건설을 위해 발맞추어 나가자.”고 다짐했던 강신항은 개전 당일 일기에 다음과 같은 소감을 기록했다.


드디어 올 날이 오다. 드디어 올 날이 오다. 드디어 올 날이 오다. 이북 괴뢰군, 오늘 새벽 다섯 시에 일요일을 이용하여 전면적으로 침입. 대포소리 요란하다. 아! 전세는 우리가 불리하다. 그러나, 그러나, 회복할 것인가? 말 것인가? 돈암동 전차 종점에서 국군을 일선으로 보내는 내 눈엔 눈물이 어리었다. (1950.6.25.)


강신항은 김성칠과 달리 인민군을 “이북 괴뢰군”으로 인식하였으며,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전선으로 향하는 국군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27일에는 “서울에 있다간 몰살, 개죽음이다. 모름지기 시골로 도피하여 시기를 기다리자.”고 다짐하며 서울을 떠났다. 그렇지만 “개죽음”을 피해 피난길에 오른 강신항 역시 ‘국민을 저버린 국가’의 모습을 목도하며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28일 열한 시에 완전히 서울을 점령했다고 괴뢰군이 발표하였다. (중략) 정부에 대한 비난이 자자하다. 왜 국방을 이렇게 허수룩하게 했느냐고 야단들이다. 정부만을 믿어오던 민주농민들의 당연한 심리다. 믿던 탑이 지금 무너지고 있다. (1950.6.29.)

어젯밤에 온양 온천까지 적의 전차대가 왔다고. (중략) 적이 벌써 온양까지 오다니. 알고 보니 온양경찰서가 자퇴하였다고. 전쟁에서 자퇴라니? 수원부터 연달아 자퇴. 남해 바다까지 자퇴하여 보려므나. (중략) 민중들은 나라와 민족을 버리고, 자기네들만이 슬며시 차를 차리고 자퇴한다고 비난이 자자. 원성도 자자. (1950.7.8.)

이렇게 하루 사이에 변한단 말이냐. 이렇게 사람을 속이는 일이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 아! 예산까지 벌써 적들이 왔다고 한다. (중략) 어젯밤에 군경이 슬며시 후퇴하였다고. 아! 믿던 탑이 완전히 넘어지는 것 같았다. 이미 우리는 적지에 남겨지고 말았다. (중략) 왜 자기들만 후퇴하는가. (1950.7.13.)

인심은 소란하고, 우익을 믿고 살아오던 사람들은 풀끼 하나 없고 얼굴이 창백하며 밥을 못 먹는다. 적의 후방에 남겨진 몸으로서, 이제는 남하하려고 하여도 남하하지 못할 형편이다. (중략) 이리하여 남하하려던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고, 하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고향에 돌아왔다. (1950.7.15.)


강신항은 전쟁 발발 직전 학도호국단 일을 그만두라는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친 뒤 그날 일기에 “주관을 가지라. 마음을 통일하라. 나의 조국은 오직 하나. 그것은 오직 대한민국뿐이 아니었던가.”라고 절규했던 사람이다. 그랬던 그조차도 국방을 제대로 못한 채 서울을 빠져나간 정부를 향해 “믿던 탑이 지금 무너지고 있다.”고 탄식하였으며, 마치 이승만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라와 민족을 버리고” 연달아 “슬며시 후퇴”하는 군경에게 “이렇게 사람을 속이는 일이 있는가.”라고 원망을 퍼부었다. 이는 단지 강신항 개인의 심정이 아니라,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부만을 믿어오던 민주 농민”과 “우익을 믿고 살아오던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결국 “적의 후방에 남겨진” 강신항은 “남하”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이때 목도한 광경은 이후 벌어질 참극을 예고하였다.

보도연맹원 전부를 총살하였다고. 아! 실수다. 그들도 한 겨레다. 사람을 아껴야 한다. 이들의 가족이 남아 있는 우익을 얼마나 해치리. 아! 실수다. 그러나 서산에서 400여 명이 죽었다 한다. (1950.7.13.)

마을마다 보도연맹원들의 장사를 지내지 않는 곳이 없다. 불안하여 안절부절하다. (1950.7.14.)

인민군이 서산까지 왔느니, 천의(天宜)에 인민위원회와 치안대가 생겼느니 하고, 보도연맹의 가족들의 눈치가 곱지 못하다 한다. (1950.7.15.)


우파 청년 강신항도 보도연맹원을 “한 겨레”로 인식하며 그들의 처형을 잘못된 일로 생각하였다. 더구나 보도연맹 학살의 여파로 우익에 대한 보복이 생겨날 것임을 예감하고 불안에 떨었다. 이러한 그의 우려는 훗날 현실이 되었으니, 인공 치하에서 보도연맹 유가족들이 보복심에서 이른바 ‘반동분자 숙청’에 적극 나섰으며, 다시 전세가 뒤집힌 다음에는 또 이들에 의해 희생된 우익세력의 유가족들이 ‘부역자 심판’에 적극 나섰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결국 보도연맹 학살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민간인 학살이었으며, 상호보복의 악순환이 시작되는 첫 단추가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김동춘, 2000, <전쟁과 사회-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돌베개.

김성칠, 1993, <역사 앞에서-한 사학자의 6·25일기>, 창작과비평사.

강신항, 1995, <어느 국어학도의 젊은 날 Ⅰ-6·25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일출판사.

박찬웅, 1990, <6·25일지-어느 대학생의 기록>, 지식산업사.

국사편찬위원회, 2004, <자료 대한민국사>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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