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에 대한 생각의 변화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오지랖도 넓고 꽉 막힌 사람이었던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사건건 참견을 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청소년기에 한창 자라날 때는, 내가 이런 사람인지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채 살다가, 군대 갔다오고 나서, 대학(2년제)에 복학하니까, 점점 그런 성격이 나오는 것 같았다. 남들 일이라면, 그렇게 신경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많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내가 어떨때, 기분이 안 좋아지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관심은 1도 없이, 남의 일에만 온 신경이 가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그렇게 나서는 스타일도 아니면서도, 사소한 남의 일에는, 자주 '감 나라, 대추 나라' 라는 식으로 참견하는 일이 잦았다. 그런 일 때문에, 대학 동기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도 친구들이 뭔이야기를 하면, '니가 그러면 안 되지', '니가 그 때는 그렇게 행동했었야지' 식으로 참견하다가, '니가 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참견하는데?'라는 친구들의 핀잔도 한번씩 듣기도 했다. 그때는 내가 아주 잘 난 줄 알았나보다. 잘 난 것 하나도 없는데, 뭐 그렇게 남들 일에 참견하고 신경을 썼는지 모르겠다. 안타까운 사실은, 주변에 아무도 나를 좋은 길로 안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완전히 '우물안 개구리'였다. 그것도 뚜껑으로 꽉 닫혀 있는 우물안에 있는 개구리 같았다. 내가 사는 세상이 다 였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 였다. 좋은 길로 안내해주는 친구나 선배도 없었고, 밝은 빛도 보이지 않는 아주 어두운 세상이었다.
그렇게 아주 어두웠던 기억의 20대를 보내고, 30대가 되었다. 20대 후반을 거의 공부하는 시간으로만, 썼기 때문에 조금은 정제된 느낌이 나는 것 같았다. 20대 중반, 군대 제대후, 2년제 대학에 복학을 한 후, 아무 생각없이 복학은 했지만, 복학 하고 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2년제 대학과 학과가 내 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중고등 시절에는, 나에 대한 고민을 전혀 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살았기 때문에, 목표도 없이 정처없이 멍하니 살다보니,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정체성이 정립되기 이전에, 사춘기와 동시에 짝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그 짝사랑을 고백하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 것 만 같아서, 아주 정성스럽게 연필로 눌러 쓴 연애편지가 툇짜를 맞자, 모든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멘탈이 아주 유리 멘탈이였던 것 같은 시기에, 나라는 존재가 부정되는 순간이였기 때문에, 친구들의 모든 위로가, 나에게는 쓴 웃음과 조롱으로까지 들리게 되었다. 순수하게 사랑했던 것 만큼 아픔은 크게 남았다. 식음을 전폐했다. 변명같겠지만, 공부는 그 이후로 내 눈에 안 들어왔다. 나는 사는 의미를 모르고 살았다. 그냥 남들이 웃어도, 울어도, 나는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고등 3년을 보냈으니, 수능 성적이 좋을 리가 없다. 그냥 취업이 빨리 된다는 2년제를 갔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공부를 하지 못했으니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나도 흘러갔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를 입학해놓고 나서, 그냥 군대는 빨리 갔다오자 생각해서, 고3 졸업하자 마자, 군입대를 준비했다. 가장 빨리 갈수 있는 방법이, 지원병 이였는데, 지원해서 갈 수 있는 곳은 해병대와 공군 밖에 몰랐다. 해병대는 무서워서 못 갈것 같아서, 공군을 지원해서 2년제 대학 1학기만 끝내고, 바로 7월달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병장을 달 때쯤, 생각이 좀 자랐는지, 군 제대후 나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2년제 나의 학과가 나에게 맞는 곳인지? 그때서야 나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정확하게 몰랐다. 나에게 맞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몰랐다.
그런데, 군 제대후 종교단체에서 교리교사로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아이들과 지내는 것이 너무나 보람됨을 느꼈다. 그런 흐뭇함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기 위해서, 교재나 사대를 가면 된다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지마자, 다시 제수를 할 마음을 먹게 된다. 처음에는 교대만 목표했기 때문에, 2년제에서 교대 편입이 안 되었다. 수능을 다시 쳐야지만 입학이 가능했다. 그래서 이것 저것 재지도 않고 제수를 시작했다. 공부를 안 해 본 놈이 공부를 하니까, 오죽 좀이 쑤셨겠는가. 하지만 목표와 의지가 있으니, 열심히는 하는데,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공부를 워낙 안 해 봤으니, 요령이 어디 있었겠으며, 군대에 가서 머리를 다 썩히고 왔기 때문에, 성적은 늘 제자리였다. 그렇게 2년 정도 삼수를 하고 점수 맞쳐서 겨우 4년제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범대가 아니라, 일반 영문학과였기 때문에, 교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지만, 교직 이수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선배에게서 듣고나서, 공부만 했던 것 같다. 상위권 성적이어야지 교직을 이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리포트를 잘 맞기 위해서, 도서관에서 살아야했다. 그렇게 늦게라도 책을 읽고 공부를 하니, 사람이 변하기 시작했나 보다. 20대는 사람도 아니였던 것 같은데, 공부를 좀 하니, 덮개로 덮힌 우물안에 있던 개구리에서, 덮개는 걷힌 우물안 개구리 정도는 된 거 같았다.
그렇게 늦게 공부도 하고, 교리교사 하면서 아이들과 지내다 보니, 점점 사람이 차분해 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원래 가지고 있던 급하고 짜증내는 버릇은 아직 남아 있었던 것 같은데, 4년제 다닐 때, 임용 시험칠 때, 도움이 된다고 해서, 복수전공도 신청해서 수업을 들어었다. 바로 심리학이었다.
학부 수준이지만, 심리학 수업 과제를 하면서, 나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어릴 때 전혀 몰랐던 나의 성향, 정체성 등이 여러 가지 과제를 하면서 발견되었다.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는, 과제를 대충 해서는 안 될 일이였기 때문에, 심리학 과제가 나올 때 마다, 도서관에서 도서 찾고, 관련된 부분을 찾으면, 몇 번씩 읽고, 어떤 식으로 과제를 제출할 지 고민하면서, 산책을 정말 많이 했던 것 같다. 정말 4년 내내 리포트와 시험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 시간을 지내다보니, 나에 대한 관찰과 고민을 하다 보니,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지금, 40대 후반이 된 나의 모습을 보니, 남의 일에 참견은 하고 있지만,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하고 그 참견의 기준이 생긴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독서와 글쓰기의 힘인 것 같다. 특히 글쓰기를 하면서,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나의 부족함을 좀 더 채우게 된 것 같다.
예전에는 앞 뒤 사정도 보지 않는 꽉 막힌 참견러 같았다면, 이제는 상대방에게 마음이 문이 열면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