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페소의 가치

by 바닐라


“아이고, 또 배가 고픈 거야?”

교통체증 지독하고, 연중 에어컨을 틀어야 하며, 도로 정비 상태 또한 험악한 마닐라에서 운전을 해보면 연비가 진짜 안 좋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주 목마른 차를 끌고 주유소에 들어가 기름을 넣는다.

이 곳에서는 주유 시작 전 꼭 주유기 계기판을 보여주며 0에서 시작한다는 걸 확인시켜준다.

믿고 사는 세상을 염원하지만 슬쩍 숫자를 올려 속이는 악덕 주유소도 있다 하니 눈 뜨고 코 베이는 외국인은 되기 싫어 굳이 얼굴 내밀고 ‘확인하는 내 모습’을 그들에게 확인시킨다.


배고픈 내 차에 주유 꼭지를 물려준 직원이 차 창으로 다가와서는 ‘앞 유리 닦아 줄까요 하고 묻는다.

비눗물이 들어있는 양동이와 유리 닦개용 스펀지 밀대를 두 손에 들고 서있는 직원의 눈동자에 의욕이 가득이다.

주저의 고개 갸우뚱거림을 긍정으로 해석한 그는 앞 유리뿐 아니라 차 뒷 유리까지 열심히 닦아준다.

밀대로는 쉬 없어지지 않는 새똥 자국은 부담스러울 만치 손으로 뽀독뽀독 지우며, 검객의 갈무리 같은 솜씨로 와이퍼 날까지 예리하게 훔쳐낸다.

20페소를 고맙다는 표시로 창문 너머로 멋쩍게 건넨다.

사실 인건비 싼 이 곳에서는 100페소 조금 더 주면 전체 세차도 가능한 세차장도 있기에 20페소가 유리창 닦은 수고에 아주 섭섭한 돈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20페소를 줄지, 5페소를 줄지, 아니면 그냥 ‘고마워’라는 말 한마디를 줄지 그는 모르면서도 이리 빡빡 닦아주니 그 수고가 크게 느껴진다.


배부르고 얼굴도 닦았으니 손발도 좀 점검해야겠지?

동네 차도는 움푹 파인 곳들이 많다 보니 타이어에 펑크 난 곳은 없는지, 공기압은 적당한지 확인하러 주유소 한쪽에 마련된 타이어 체크 포인트로 옮겨간다.

원하는 압력 정도를 말하면 네 바퀴에 바람을 쓕쓕 넣어주고, 원하는 차들에게는 냉각수 용 물도 보충해준다(오래된 연식의 차들은 냉각 전문 용액이 아닌 그냥 맹물을 보충해가며 냉각수로 사용한다.)

그에게도 20페소를 감사의 표시로 건넨다.


주차하려고? 따라와!

문구점도 들르고 슈퍼마켓도 가고, 은행 볼일도 보면서 차를 뺐다 댔다 하는 동안 나는 주차 도우미들의 호위를 받는다.

사실 이 사람들이 어디 소속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구청쯤 되는 행정기관 소속인지, 주차 관리 위탁 회사 소속인지, 그것도 아니면 길거리 거지 조합에서 파견된 강제 노동력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주차할 때 어김없이 등장해서는

‘여기에 주차해라’

‘앞으로 차 머리를 더 집어넣어라’

‘이제 괜찮으니 후진해서 나와도 된다’라는 수신호를 바쁘게 해댄다.

가끔씩 나이 어린 꼬맹이 소년들도 이런 도우미를 자처하고 나서는데 절대 이들의 수신호를 완전히 믿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ok를 따르는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러나 주행 중인 다른 차를 온몸으로 막아가며 내가 가야 하는 방향으로 길까지 터주는 노력이 고마워서 나는 또 5페소 동전 두어 개를 건넨다.


이렇게 마닐라 거리에는 10페소 내지 20페소로 얻게 되는 소소한 서비스들이 꽤 있다.

이런 서비스들은 차에 관한 것뿐 아니라 슈퍼마켓이나 백화점, 대형 몰 같은 곳에서도 받을 수 있는데, 장 본 물건들이 많거나 혼자 들고 가기 부피 큰 물건 같은 경우에는 가게 직원들이 카트도 밀고 박스도 들어서 차 있는 곳까지 와서 실어준다.

우기가 시작될 즈음 새 와이퍼를 사러 하드웨어 샵에 갔을 때는 부착방법을 꼬치꼬치 묻는 내가 못 미더웠는지 판매원은 직접 내 차까지 와서 교체를 해주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거 같은 하늘을 보니 너무 고마워서 20페소 여러 장을 꺼냈었다.


모두 인건비 싼 나라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호사이다.

그러나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팁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그 서비스들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얼마를 내밀어야 적당한 건지 알 수도 없었다.

어떤 몸짓으로 돈을 건네야 나는 덜 쑥스럽고, 그들은 유쾌할지 몰라서 괜히 돈을 꼬깃꼬깃 접기도 하고 굳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슬쩍 고개를 숙이기도 했었다.

십여 년을 살아보니 이제 알겠다.

그들은 그런 서비스를 해주면서 심각한 표정을 한 적이 없었던 거 같다.

‘이런 거까지 내가 해 줘야 돼’ 같은 억울한 표정도 없었고, ‘이렇게 해주니 너 꼭 기억해라’ 같은 생색의 표정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주고 좁은 도로에서 상대가 지나가기를 잠시 기다려주는 것 같은, 돌아서면 곧 잊히는 그런 것이었다.

받으면 기분 좋지만 안 받아도 큰 불편은 없는 서비스들.

그래서인지 그들도 20페소를 받았다고 아주 고마워하지도 않고, 또 끝까지 팁을 받겠다고 멀뚱이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런 서비스를 받고 내미는 동전 몇 개가 내가 가지고 있을 때보다는 상대에게 건너가면 더 커다란 의미가 되기에 이 나라 사람들은 굳이 그 서비스를 주고받고 있는 것이며, 나도 자연스레 따라 하게 된 거 같다.

이제는 나도 좀 넉살이 좋아져 20페소와 함께 환한 웃음을 보여주려 하고 어떨 때는 간단한 농담까지 건네기도 한다.


20페소, 우리나라 돈으로 500원이 안 되는 돈이다.

나는 이제 그 돈을 내밀며 ‘이거 너무 야박한 거 아냐’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아니, 별 거 해준 것도 없는데 굳이 20페소를 줘야 해?’ 하는 순간의 갈등 따위는 접어두기로 했다.

20페소에 비해 훌륭한 도움을 받으면 횡재인 것이고, 가끔 아무 이유 없이 20페소쯤은 그들에게 건네도 될 만큼 그들의 미소는 환하다.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야 나의 20페소는 그 액면가보다 더 가치 있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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