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부터 학교 문턱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1년여 넘게 온라인 수업만 한 작은 아들이 며칠 전 고등학교 졸업을 했다. 필리핀의 코로나 봉쇄 지침은 미성년자와 노약자에게는 특히 엄격하여 바깥출입 자체가 안 되는 날도 몇 달씩 지속되었다. 그렇게 가택연금이나 다름없는 1년 3개월의 시간을 별다른 불평 없이 잘 견뎌준 아들이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아들의 예전 사진을 뒤적이다 보니 오래전 어느 밤이 떠오른다.
십여 년 전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이곳 필리핀에서 했으니 두 살 터울이 나는 작은 아들은 유아어를 갓 떼고 온 셈이었다.
호기심 많고 조잘조잘 대는 큰 아들과 달리 작은 아들은 말을 배우는 속도도 느리고, 엄마인 나에게도 하루 종일 몇 마디 건네지 않는 과묵한 어린이였다.
그런 아이가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 와서 유치원에 가고, 친구도 사귀어야 하니 영어 배우기도 급했지만
아직 한국어도 완벽하지 않은 아이라 동화책을 한국에서부터 이고 지고 와서는 밤마다 두 아들에게 읽어주는 게 내게는 큰 숙제였다.
그날은 ‘나무꾼과 선녀”이야기를 읽어주고 있었다
글밥이 꽤 많은 전래동화라 목은 칼칼해져 가는데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장난치고 있는 아이들에 성질이 나기 시작했다.
------사슴이 다가와 나무꾼에게 울면서 부탁했습니다……마음씨 착한 나무꾼은 사슴을 숨겨주고
나무를 하고 있었는데 포수가 다가와 나무꾼에게 물었습니다…-
긴박한 장면이었기에 사실감을 주고자 나는 잘 되지도 않는 음성변조까지 해가며 열심히 읽어나갔다
“여보시오, 나무꾼! 이리로 사슴 한 마리가 달아나는 걸 못보았…….”
관심 없는 척 딴청을 부리던 작은아이가 이 부분에서 갑자기 얼굴을 획 돌리더니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엄마!! 나무꾼 아저씨랑 포수 아저씨가 커플이었어????”
‘으으응?? 커.. 커플? ’
‘여보라며..?”
"???????"
마닐라 거리에는 수염 숭숭 난 얼굴에 분홍빛 립스틱을 바르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씰룩 쌜룩 걸어 다니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공연히 커밍아웃하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그런 모습들이 기억에 남아서였을까.
이 '여보시오'는 그 여보가 아니라고 설명을 해주었는데도 그날 밤 작은 아들은 의혹이 말끔히 사라지지 않은 복잡한 얼굴로 잠자리에 들었었다.
Image by Jill Wellington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