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의 중고나라

by 바닐라

‘단결 투쟁’

‘인간답게 살고 싶다’

투사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의 어느 하늘 아래에서 열혈 투사가 두 주먹 불끈 지고 힘차게 외칠 때 입고 있었을, 저 처절한 문구 새겨진 그 옷을 여기 마닐라 변두리 동네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허름한 면 티 위에 ‘ㅇㅇ노동조합’이라고 새겨진 남색 조끼를 입고 지나가는 남자는 짐 한 가득 실은 자전거 페달을 힘겹게 밟고 있었지만 표정은 아주 밝았다. 이 동네 토박이인지 아니면 성격 자체가 사교성이 좋아서 인지는 몰라도 지나가는 이들과 인사도 주고받고, 손도 흔들어 가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이가 아주 많은 거 같지 않은데도 앞니 두어 개가 없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그의 웃음을 해맑아 보이게 했다.

타고 있는 저 자전거 바퀴를 펑크 나게 할 길바닥 뾰죡한 돌멩이한테 말고는 평생 싸움 걸어본 적 없었을 것 같은, 유약해 보이는 중년의 필리핀 남자가 입고 있는 옷에는 ‘단결투쟁’이라는 한글이 또렷이 써져 있었다.


아마도 한국의 어느 의류 수거함에 있었던 옷이 돌고 돌아 배를 타고 여기까지 와서 저 남자에게 입혀졌나 보다.

저 남자는 아무런 뜻도 모르고 입었겠지만 내 눈엔 그의 굴곡져 보이는 검은 얼굴에 너무 찰떡 맞춤옷처럼 보였다.

절절한 외침 같은 저 문구와 그의 환한 웃음이 대비되면서 나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좀 호들갑스럽게 얘기하자면 책에서 배운 단어 ‘페이소스’ 그런 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외국에서 보는 한글은 더 반갑고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

지금은 k-pop열풍에 한국 드라마, 수출용 한국 식품들이 큰 인기를 누리는 탓에 TV나 슈퍼마켓에서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십여 년 전인 그때는 한국음식점 간판 말고는 한글이 눈에 띌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동네 길거리에서 이렇게 생생한 한글을 마주하게 되니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거기다 저리 사연 많아 보이는 바다 건너온 옷에 찍힌 한글이라니.



사실 필리핀으로 들어오는 재활용품은 한국이나 일본에서 오는 것들이 많았기에 저런 생뚱맞은 한글 옷은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어떤 날은 강렬한 빨간색의 ‘해 병 대’ 세 글자 뚜렷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생선 팔고 있는 아저씨도 보았고,

또 어떤 상점 앞에서는 '녹색 어머니회' 조끼를 입고 주차 관리를 하고 있는 청년을 보고

‘거 참 맥락 있게도 옷을 잘 골라 입으셨군’ 하고 미소를 지었다.

호남 향우회의 옷을 입고 있던 트라이시클 기사에게는 “반갑소잉”하고 농담을 건네고 싶은 충동도 일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악수라도 한번 건네고 싶어 지기도 했다.


마닐라 변두리에는 ‘우까이 우까이’라고 하는 중고 옷 가게들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 돈으로 몇백 원부터 아주 비싸야 몇만 원에 파는 먼지 폴폴 날리고 후텁지근한 가게들이지만 취급 품목도 다양해서 유아용 옷, 남녀 성인용 옷뿐 아니라 신발, 가방, 모자까지 구색 다 갖춘 잡화점이다.


그런 중고가게에 재활용품을 납품하는 지인에게 들으니 저런 물건들은 종류별로 일정 kg단위로 분류, 포장되어 한국으로부터 오는 것인데 내용물의 상태 같은 것은 서로 일일이 묻고 따지지도, 따질 수도 없으며 그저 종류와 무게당 가격만 확인하고 거래가 성사되면 납품한다 했다.

가장 잘 팔리는 인기 있는 품목은 신발이라 했는데 멀쩡해 보이는 브랜드 운동화나 몇 번 신은 거 같지 않은 하이힐들은 먼지나 냄새만 좀 털어내면 새 것같이 보일 것도 같았다.



요즈음은 인터넷과 SNS가 발달되다 보니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을 통해서 중고 옷을 파는 개인 판매자도 꽤 있다.

진정한 생계형 인플루언서가 아닌가 싶다.

헬퍼 아가씨가 저녁마다 들여보고 있던 핸드폰 속에서 전혀 팔릴 것 같지 않은 옷들이 나름의 가격표를 달고 진지하게 흥정되고 있는 모습은 생경한 풍경이었다.


이런 중고 물품의 주 고객층은 아무래도 새 옷 턱턱 사는 호사 따위를 부릴 수 없는 서민층이다.

요즘에는 한국도 중고가게가 활성화되고, 나눔의 문화가 퍼져 나가면서 중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빈티지 문화로 다시 태어나기도 하지만, 이 곳 우까이 우까이에서 팔리고 있는 꼬질꼬질한 중고물품들은 사실 좀 서글퍼 보이기도 한다.


일상이 녹녹지 않으니 우까이 우까이를 찾아가지만, 그들도 어디서부터 온 건지 모르는 남이 쓰던 물건에 대한 찝찝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쓰던 물건에는 전 주인의 사연이나 영혼 같은 게 담겨 있다고 말하는 무속인들도 있고, 이런 얘기는 공포영화의 소재로도 종종 사용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찝찝한 마음 따위는 사치일지 모르는 이 곳 우까이 우까이 단골들에게 이 나라의 뜨거운 태양이 최고급 의류 ‘스타일러’가 돼주기를 나는 바래본다.

케케묵은 먼지와 bad luck은 필리핀 태양이 홀라당 휘발시켜 버리고 좋은 사연, 좋은 기운만 남아 우까이우까이 고객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노동조합 조끼를 입은 그 아저씨에게는 삶에 꺾이지 않는 불굴의 패기가, 해병대 티셔츠를 입은 사람에겐 귀신도 때려잡는 용기가, 뜻하지 않게 녹색 어머니회 회원이 된 그 주차 관리 청년에게는 평생 교통사고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 포근한 일상이 펼쳐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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