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나무 Aug 21. 2023

버스에서 만난 이름 모를 환대

낭만이 숨 쉬는 버스 1

여러 대중교통수단 중 버스를 가장 좋아합니다. 가만히 앉아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멍 때림 장소이고, 바람을 느끼고 싶을 땐 조심스레 창문을 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버스는 다른 대중교통에 비해 융통성 발휘가 가능하다는 것이 매력적입니다. 물론 도시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시골 마을에서는 간발의 차로 버스를 타지 못한 할머니를 발견하고 찬찬히 후진을 하는 모습을 목격하거나 마지막 손님을 위해 경로를 살짝 벗어나는 특별서비스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버스는 지하철보다는 좀 더 여행하는 느낌이 나고, 기차보다는 일상의 면면을 보여 줍니다. 때문에 평소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지하철보다는 버스를 택하는 편입니다. 여행지에서는 더욱이 그렇습니다. 굽이굽이 돌아가서 훨씬 오랜 시간을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마저도 여행의 과정이란 느낌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기에 제 마음도, 버스 안의 풍경도 여유가 넘칩니다.


남동생과 새해맞이를 위해 여수로 짧은 여행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숙소에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을 찾다 향일암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멋진 경치를 간직한 사찰로, 시내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지만 다행히 숙소 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달리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종점. 어디서 내려야 할지 고민하지 않고 버스가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변하는 창밖 풍경을 맘 편히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니, 이보다 매력적인 선택지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해안도로를 달리는 버스를 좋아합니다.


기대하는 마음을 안고 버스에 올랐는데 이런, 앉을자리가 하나 없이 버스는 원주민과 여행객으로 가득 차 버스 앞쪽 손잡이를 겨우 잡고 섰습니다.


“놀러 왔어요?”

“네?! 아… 네!”

“향일암 가는구먼”

“맞아요!”


경쾌하게 인사를 건넨 분은 짙은 분홍색 점퍼를 입은 할머니 셨습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 둘은 무슨 사이인지… 호구조사(?)를 마치시고 나니 더 이상 궁금한 게 없으신지 질문을 멈추셨습니다. 대신 버스가 정거장에 설 때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셨고, 이따금 눈이 마주치면 환히 웃어주셨습니다. 뒷문으로 내려야 하니까 편하게 미리 자리를 옮기시려나 보다 싶었습니다. 잠시 후, 보물을 발견한 듯 신이 난 목소리에 멍했던 정신이 단숨에 돌아왔습니다.


“자리 났다! 뒤에 가서 앉아요. 종점까지 가려면 멀어~”


추운 날씨를 녹이는 말이었습니다. 서울에서부터 여수까지 새해를 맞으러 온 여행자가 오랜 시간 서서 이동해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려 계속 고개를 돌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신 할머니. 덕분에 우리는 버스 제일 끝자리에 앉아 종점까지 편히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도착하자마자 입구에서부터 어마한 수의 뒷모습과 통제 불가능한 차들을 보고 뒷걸음쳐 나왔지만 짜증 나지도, 아쉽지도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왔기에 향일암 옆에 조용하고도 아름다운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름도 알지 못하는 할머니의 환대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다음 버스를 타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에 무작정 걷기 시작했고, 그렇게 이름도 예쁜 '소율'이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이전 01화 길에서 만난 낭만에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