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보

단어에 꽂혀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에세이

by 반년작가

단어에 꽂혀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에세이


“너 이건 안 될 것 같은데?"



말을 꺼내는 순간 아마 이런 대답을 듣게 될 거란 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의지가 꺾이고 싶지 않아서, 근래의 불분명한 나의 행보를 사람들에게 숨기려 드는 걸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나 스스로 확신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턱을 괴고 앉아 안개가 흩뿌려진 나의 뿌연 앞날을 바라보았다. 이 막연한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뱉어내고 어디엔가 나를 마구 쏟아내고 나면, 적어도 답답했던 마음이라도 풀릴 줄 알았는데 전혀 개운치 않았다. 오히려 지체되는 시간이 계속 늘어날수록 나의 머릿속에는 비관적인 생각의 씨앗들이 조금씩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과연 이걸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아무래도 잘 될 가능성이 작은 것 같다’




작년 연말, 나는 도망치듯 회사를 나왔다. 오래전부터 고민해왔던 일이지만 이렇게 춥고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에 모든 짐을 챙겨 도망치듯 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 보름 정도만 더 버텼으면 크리스마스와 신정이라는 꿀 같은 공휴일도 다가오고, 조만간 내년 연차도 새로 생겨나는 데다가, 기다렸던 연봉협상도 코앞에 남겨둔 시점이었다. 퇴사를 한 이유는 일보다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이유가 제일 컸지만, 결론은 여러 가지가 중첩되면서 터진 마음의 병 앞에서는 장사 없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 전공부터 졸업 후의 커리어, 심지어 사소한 취미 활동까지도, 나의 코어 힘이 나를 이끄는 대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왔다. 나를 지탱하는 모든 것들이 회사 안에서 무너져 내렸던 그때, 더는 공휴일이든 내년 연차든 아니면 연봉 협상이든 그딴 건 내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렴 어떤가, 죽어가는 나를 먼저 살려야지.



일단, 무겁게 짊어진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겨 본다. 이번에 혼자 걸으면 꽤 오래 걸어야 할 것 같아서, 걸어갈 방향과 목적지를 새로 정하기 위한 밑 작업에도 꽤 많은 시간을 들여 정성을 쏟아 붓기로 했다. 우선 바스러졌던 내 마음에 보수 공사부터 시작했다. 몇 날 며칠을 집에 처박혀서 책을 읽거나 피아노를 치면서 하루하루를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 나를 달랬다. 그리고 오래 걸을 수 있는 체력을 미리 길러두려고 미친 듯이 운동을 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혼자 견뎌 내야 할 테고 앞으로 닥쳐올 어려운 관문들을 문제없이 통과해야 하는데, 아이고 어느 세월에. 가는 길이 참 쉽지 않다. 그런데 숨을 고르며 천천히 걷다 보니, 불분명해 보이는 내 행보가 주변 사람들에게 티가 났나 보다.




“네가 앞으로 무얼 하려는 건지 모르겠어. 요즘 네가 하는 것들은 대체 왜 하는 건지 하나도 이해가 안 가”




비유해서 설명해보자면, 사람들은 대체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당연하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연필을 깎아 천천히 선 긋기를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무슨 그림을 그릴 건지, 지금 긋고 있는 그 선으로 어떤 그림을 어떻게 완성할 건지, 아주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설명을 곁들여 그들을 납득시켜주기를 원했다. 아마 엉뚱한 시기에 멀쩡한 회사를 박차고 나와버린 내가, 그리고 내가 지금 하는 모든 것들이 영 시답지 않았나 보다. 밑그림 상태인 지금 내 모습을 딱히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나름대로 열심히 숨기려 했지만, 나와 가깝게 지내는 그들의 요구사항에 어쩐지 부응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우선,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부터 시작해서 어떤 가치관과 목적의식으로 살고 있는지, 그래서 지금 긋고 있는 선들을 이어 나중에는 어떤 그림을 완성하려고 하는지, 모든 이유를 시간 순서에 맞춰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그 과정들이 나에게 얼마나 필요한 과정들인지, 얼마나 생산성 있고 효율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 타당성 있고 설득력 있는 말들을 길게 늘어놓으며 충분히 이해시켜줘야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은 무조건 ‘성공적인 결말’로 마무리 지어줘야 일단 대부분 안심했다. 그러나 아무리 짜임새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쉬운 설명을 해줘도 백이면 백, 그래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며 여전히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이쯤 되면 왜 내 행보를 누군가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건지, 이건 대체 누구를 위한 꿈인지 모를 정도로 납득의 굴레가 되풀이될수록 오히려 공허한 기분만 쌓이기 시작했다.




물이 끓기 전에는 아무 변화도 없어 보이는 것처럼. 씨앗을 뿌리고 새싹이 올라오기 직전의 땅에는 아무 변화도 없어 보이는 것처럼. 겉으로 봤을 땐 현실을 외면한 채 단절하고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지금은 축축한 땅 아래에서 나는 나를 탐험 중이고 긴 인고의 시간을 외로이 견뎌내며 다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다.


물을 듬뿍 주고 햇볕을 잔뜩 쬐어 줘도 한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들인 정성만큼 새싹이 빨리 나오지 않아 불안하고 조금 답답하게 느껴지는 날도 있겠지만. 이번만큼은 급하게 뛰다가 일찍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멀리 내다보고 오래 걸어보려고 한다. 열망은 가슴속 비밀로 숨겨 둔 채, 은밀하게 혼자 시작해본다.



‘행보’라는 단어는 ‘어떤 목표를 향하여 나아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밤처럼 느껴지는 시간, 내가 별을 보고 따라가다 보면 결국에는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단어
「행보(行步)」
1. 걸음을 걸음. 또는 그 걸음.
2. 일정한 목적지까지 걸어서 가거나 다녀옴.
3. 어떤 목표를 향하여 나아감.
4. 목적한 곳으로 장사하러 다님.

- 출처 : 국립국어원《표준국어대사전》 -


[날것? 날것!] : 단어에 꽂혀 이야기를 풀어내는 에세이

'[날것? 날것!] : 단어에 꽂혀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에세이'의 제목은 날것 그대로의 솔직한 글을 뜻하는 ‘날것’과 날개가 돋친 듯 승승장구 높이 날고 싶다는 염원을 담아 본 ‘날것’, 한 단어가 가진 중의적인 의미에 꽂혀 재치 있게 표현해보았습니다. 주로 특정 단어나 단어가 가진 뜻에 꽂혀 보통의 일상 이야기를 풀어내는 걸 좋아합니다. 현상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첫 순간에 느껴지는 날것 그대로를 기록하기 위해 노력하며 ‘날것?’으로 도약하여 ‘날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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