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늦은 오후, 우체국의 문이 열리고 노아가 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
노아는 고개를 90도로 숙여 인사를 하고는 뒤돌아 계단을 내려왔다. 한 칸씩, 두 칸씩, 연인과 계단을 내려가는 대학생처럼, 노아는 놀이하듯 계단을 뛰어내렸다. 저물어가는 노을을 조명삼아 걷다가, 이따금 어깨를 들썩이며 노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윽고 노을이 짙어지자, 그는 잠시 노을을 등지고 서서 자신의 그림자를 구경하였다. 팔다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길게 뻗어나가는 자신의 신체를 보다가, 자전거가 지나가면 바퀴 그림자를 손으로 막아도 보았다. 바퀴 그림자가 손을 뚫고 얼굴을 지나가자 재밌는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배를 붙잡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낮게 잎을 낸 나무는 일일이 손을 올려 만져보았고, 높게 올려 핀 꽃은 쭈그리고 앉아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다 편의점이 보이자 발걸음이 빨라져 뛰다시피 편의점에 들어갔다.
노아는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몸을 숙여 누군가의 선물을 고르는 사람처럼 한참을 뒤적이다가 복숭아 아이스크림 두 개를 골라잡았다. 계산을 마치고, 노아는 아이스크림에 체온이 전해지지 않게 조심스레 막대 부분의 비닐만 잡고선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서도 그는 아이스크림이 최대한 흔들리지 않게 중심을 잡았다. 집에 도착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노아는 입가에 마음대로 지어지는 미소를 막을 수 없었다. 현관에서 한참 숨을 고르고, 노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몸을 꼿꼿이 세우고 베란다를 향해 걸었다. 문을 열면, 사람 하나 앉을 정도로 작은 폭의 베란다가 키 작은 난간을 사이에 두고 마당과 연결되어 있다. 노아는 베란다에 걸터앉아 아이스크림 하나는 옆에 두고, 하나는 비닐을 까서 입에 넣었다. 마당 너머로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숲길이 나있다. 노아는 숲길에 시선을 두고는 천천히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여전히 입에는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날이 어두워지며 노아의 얼굴에선 서서히 웃음이 사라졌다. 이윽고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밤이 깊었을 때, 노아는 얼굴에선 더 이상 미소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노아는 쓸쓸한 표정으로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들고 거실로 들어가 베란다 문을 잡았다.
“내일 또 올게.” 노아는 베란다 문을 닫으며 속삭였다.
“이번 주도 매일 베란다에서 시간을 보낸 거야?”
“정확히는 기다린 거지.”
“퇴근하고 계속?”
“퇴근하고 계속.”
노아와 창은 운동장 벽에 기대어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다릴 땐 보통 무슨 생각을 해?”
“아이스크림이 녹아 버리는 것에 대해 생각해.”
“아이스크림?”
“그녀를 만났을 때 같이 먹었어.”
“아이스크림이 녹아 버렸어?”
“매일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기다리거든. 아무래도 뭘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근데 나타나질 않으니까 녹아버리는구나?”
“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을 거 아니야? 뭘 좋아하는지 안 물어봤어?”
“얘기해 본 적 없어.”
“한 번도?”
“한 번도.”
창은 맥이 빠진 듯 보였으나 노아에겐 애써 티 내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창은 다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럼 만날 때마다 같이 아이스크림만 먹은 거야?”
노아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창에게 대답했다.
“그날 이후로 찾아온 적은 없어. 딱 한 번 뿐이야. 만난 건.”
창은 말없이 노아를 바라보았다.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그는 이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사람, 날이 추워지기 전에 얼른 다시 오면 좋겠다. 다음에 만나면 추운 날에는 뭘 좋아하는지 꼭 물어봐. 추운 날에도 계속 아이스크림을 사면 안 되니까.”
낮 병원은 주로 정신질환으로 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사회로 복귀하기 위해 낮에 시간을 함께 보내는 곳이다. 이곳에서 환자들은 함께 운동을 하거나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일상생활적응 훈련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노아는 주말마다 이곳에서 봉사자로 일한다. 처음엔 단기간 기분전환이나 할까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했지만, 몇 개월째 매주말마다 봉사를 나오며 노아에겐 낮 병원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창이란 이름의 청년은 낮 병원의 유일한 젊은 환자였다. 모두가 별명으로 불리는 낮 병원에 입원하며 스스로 ‘창’이라는 별명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가 어떤 병으로 정신 치료를 받았는지 노아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을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낮 병원 봉사자들에게 요구되는 거의 유일한 규칙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기억도 나질 않아. 성격도 아예 모르고. 내가 제정신이 아닌 걸지도 모르겠어.” 노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창은 커다란 눈으로 미소를 지은 채 노아를 바라보았다. 티 한 점 없이 흰 얼굴에 부담스럽지 않게 짙은 눈썹과 오뚝한 콧날이 잘 어우러져 창의 커다란 눈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항상 빛나는 창이었지만, 대화할 때마다 상대를 조명하는 커다란 두 눈에선, 자신보다 상대를 더욱 빛내려는 의지가 느껴진다고 노아는 생각했다.
“사진을 붙여놓는 게 어때?”
“내가 사진을 가지고 있을 리 없잖아.”
“꼭 그녀의 사진일 필요는 없어. 그저 그녀를 떠올릴 수 있는 사진이면 돼.”
“그녀의 사진일 필요가 없다고?”
“물론이야. 심지어 그 사진 속 인물이 그녀랑 닮은 부분이 전혀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너에게 그 정도의 강한 끌림을 줬다면 그녀를 떠올리지는 못해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거든. 지금은 일단 다른 모습으로 기억하겠지만 그녀를 다시 만나면 분명 알아볼 수 있을 거야.”
“바보 같은 생각이다.” 노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시시하지 않은 생각이지.” 창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답했다. “이름도 붙여놔. 다음에 와서 나한테 알려줘.”
부드러우면서도 확신에 찬 창의 말에 노아는 왠지 의지가 되었다.
“한번 만났을 뿐인 상대를 좋아하는 거 이해가 가?”
“물론이야.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생기는 마음에 일일이 이름표를 붙이는 게 우리의 본능이야. 어느 날 네가 의도적으로 그중 하나를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다면 그 이후부터 그와 관련한 모든 것이 너에겐 사랑으로 인식되겠지.”
“그 얘기는 마치 내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아 그렇게 들렸어? 미안.” 창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 얘기는 실제 너의 감정이 뭐였는지는 두 번째라는 말이야. 때로는 자신의 감정이 헷갈리거나 그것에 확신이 생기지 않을 때도 많아. 나는 실체보다 중요한 것이 인식이라고 생각해.”
“내가 뭐라고 부르기로 했는지가 첫 번째라는 말이야?”
“그렇지.” 창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그 마음을 뭐라 부르던 그 순간부터 실제로 그렇게 되는 거야.”
둘은 여전히 운동장 구석에 등을 기댄 채 운동장 끝에 연결된 건물을 바라보았다. 열린 유리문으로 환자들이 일어나 둘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아마 쉬는 시간이 끝난 모양이었다. 창과 노아는 환자들을 향해 손짓으로 대답하며, 천천히 일어나 운동장을 가로질러 건물로 향했다.
건물에 들어서자 봉사자 담당 선생님이 노아를 불렀다.
“노아. 아까 일과표 확인했죠? 오후엔 음악치료가 있을 예정이에요. 가서 피아노를 옮기는 것 좀 도와줄래요?”
“네 선생님.” 노아는 창에게 눈길을 한 번 주고는 위층으로 올라갔고 창은 책상에 앉았다.
노아가 다용도실에 도착했을 때, 알통 아저씨가 먼저 와서 혼자 낑낑대며 피아노를 옮기려 하고 있었다.
“아저씨! 여기 있는 거 선생님께 들키면 아저씨 혼나요.” 노아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 같은 사람이 힘을 써야죠.” 알통 아저씨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낮 병원에선 프로그램과 관련한 모든 준비과정에 환자들이 돕는 것을 일절 금지하고 있다. 겉으론 이상 없어 보여도 몸을 자기 맘대로 쓰지 못하는 환자들이 더러 있어 이들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모든 배려를 무시한 채, 힘쓰는 일만 생기면 알통 아저씨는 힘자랑을 하려 뛰어들어 늘 담당 선생님께 혼이 나곤 한다. 매번 혼나면서도 어김없이 뛰어와 그 작은 체구로 낑낑거리며 힘을 쓰지만, 결국 성과도 없이 자리로 돌아가는 알통 아저씨를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우리 같이 옮겨요.”
“저 혼자도 들 수 있는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알통 아저씨는 혼자서는 도저히 자신이 없는지, 슬그머니 노아에게 한쪽 자리를 내어주었다.
둘은 낑낑거리며 계단을 내려가 1층으로 피아노를 옮겼다. 알통 아저씨가 낑낑대는 모습을 발견한 담당 선생님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알통님. 힘쓰는 건 봉사자 선생님께 맡겨두라고 했을 텐데요?” 담당 선생님은 팔짱을 낀 채 아이를 혼내듯 알통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말을 그렇게 했지만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담겨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저 같은 사람이 힘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통 아저씨는 황급히 뒷걸음질 치며 변명했다.
책상 주위로 둘러앉아있던 노인 환자들은 몹시 귀엽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노아도 같이 웃었다. 잘못해도 화내지 않고 뭐든지 기다려주는 이곳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노아는 새삼 이곳이 너무 좋았다.
봉사를 마치고 노아는 항상 집까지 걸어서 이동한다. 가로수가 일정한 간격으로 수 놓인 강변도로를 걸으며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과 그 빛에 조명된 거리를 구경한다.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지면 발걸음 뒤로 아주 옅게 분홍빛의 그림자가 뒤따라온다. 참 아름다운 동네라고 노아는 생각했다. 하늘이 점차 보랏빛으로 변해갈 때쯤 노아는 강변도로를 가로질러 골목 안으로 들어가, 통나무를 쌓아 만든 모양의 목재 가정집 같은 가게 앞에 멈췄다. 노아는 간판도 없는 가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위의 작은 팻말엔 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해가 저물 때 노을을 바라보며 걷다가, 해가 지면 한적한 바에서 간단한 요깃거리에 술을 곁들이는 것이 한 주를 마무리하는 노아만의 의식인 셈이었다.
“달 사장님, 저 왔어요.” 노아는 바 좌석에 몸을 앉히며 크로스백을 풀어 구석에 놓았다.
“노아 왔어? 오늘도 봉사 다녀오는 길인가?”
“늘 그렇죠.”
“부지런하구나! 기특해!”
“오천 원 정식이랑 하이볼 한 잔만 주세요.”
“오케이!”
달 사장이라 불리는 남자는 큼직한 등을 돌려 음식을 조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몸집이 매우 컸지만, 마냥 지방으로만 덮여있을 것 같지는 않은 그야말로 강인해 보이는 덩치를 가진 사내로, 양팔과 목덜미, 턱 근처가 온통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에 반해 얼굴은 하얗고 어디 한 군데 날카로운 구석이 없이 둥글둥글하여서 한 눈에도 악당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늘 웃는 얼굴이었으나 목소리가 크고 호탕하여 노아도 그와 친해지기 전까지 그에게 묘하게 위압감을 느꼈다. 그 덕분인지 노아는 이 가게에서 취객이 소란을 피우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여기! 오늘의 오천 원 정식! 기다려 술도 곧 줄 테니까.” 달 사장은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으며 접시를 들고 왔다. 보통의 경우엔 마실 것을 먼저 주겠지만 노아에게 달 사장은 항상 음식을 먼저 내주었다. 성인 남자 손바닥 크기의 접시에 작은 생선구이가 여럿 담겨있었다.
“생선구이네요. 무슨 생선이에요?”
“시사모구이. 혹시 전에 먹어본 적이 있나?”
“아뇨 처음이에요. 냄새는 마음에 드는데요?”
“아주 맛있을 거야. 원래는 겨울철에 나는 생선인데 말이야. 요즘은 냉동으로 잘 나와 있어서 이렇게 이른 시기에도 그 맛을 낼 수 있지.” 달 사장은 술을 가져다주며 말했다.
“시사모구이.” 노아는 음식의 이름을 되뇌며 하나를 입에 집어넣고 하이볼을 한잔 들이켰다. 생선의 고소한 맛과 짠맛이 매우 적절하게 어우러져 빈속의 술안주로 아주 적당했다. 노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주 맛있어요.”
“당연하지! 오늘의 오천 원 정식이니까. 가게 단골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잖나!” 달 사장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노아도 따라 웃었다. 노아는 달 사장의 웃음이 전염성이 아주 높다는 생각을 했다.
밤이 깊어지면 비어있던 테이블에 손님들이 하나둘 자리하지만, 주말의 바 좌석 구석은 항상 노아와 어느 장발 남자의 차지이다. 손님이 좀 잠잠해지면 달 사장은 둘의 맞은편에 앉아,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다. 이들 사이에서 노아는 주로 듣는 편이었다.
“이 사진을 봐요.”
함이 핸드폰을 내밀며 말했다. 핸드폰 속엔 커다란 나무의 사진이 찍혀있었다. 얼핏 봐도 웅장하고 위엄에 찬 기운이 느껴지는 나무였다.
“제가 찍은 사진은 아닌데요. 이 나무는 나이가 천년이 넘었대요. 마을 어르신들에 의하면 약 500년 전부터 이미 마을에선 신성시되는 나무여서 마을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마을 대표들이 모여서 항상 나무에 기도를 드렸다고 해요. 마을에선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무 주변으로 크게 원을 그려 울타리를 쳤어요. 처음엔 나무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계선 정도였지만 나중엔 이 울타리도 묘하게 신성시되어서 울타리를 마음대로 넘어가는 것도 마을에선 금기로 여겨졌다고 해요.” 함은 둘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아이 한 명이 야심한 밤에 겁도 없이 나무를 타고 올라간 거예요. 그 아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전해진 바가 없답니다. 아마도 어린이 특유의 무모함이었겠지요. 그 커다란 나무 위에서 조금씩, 조금씩 높이 올라가던 아이는 그만 발을 헛디뎌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어요. 그 떨어진 곳이 울타리 안이었고요. 야심한 밤이었지만 마을 한가운데 나무 아래서 피 흘리고 쓰러져있는 아이를 분명 누군가는 발견했을 텐데도 아무도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답니다. 결국 아이는 다음 날 죽은 채로 발견되어 매장되었어요.”
“저런.” 달 사장은 안타까움을 담은 추임새를 넣었다.
노아는 조용히 핸드폰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봤다.
“근데 재밌는 건.” 함은 고개를 앞으로 숙이며 말을 이었다. “그 이후 이 아이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는 거에요.”
“어째서?” 달 사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함은 그 반응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유는 알 수 없어요. 어쩌면 겁이 나서 아이 하나 살리지 못한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오랜 신화를 이용한 걸지도 모르죠.”
달 사장도 노아를 따라 조용히 핸드폰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본 후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왠지 무서운 사진이야.”
그러자 함은 핸드폰을 다시 가져가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그날 피를 흘리며 죽은 아이가 수호신으로 모셔진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뭔가?” 달 사장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함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실 그날 피를 흘리며 죽은 건 나무 위에 올랐던 아이의 형이었습니다. 그 높은 나무 위에서 추락할 것을 직감한 동생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형이 용감하게도 금기를 깨고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 나무 아래서 동생을 받아준 것이지요. 동생은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지만, 생명은 건졌습니다. 형이 그를 대신해 죽은 거예요. 동생의 죽음을 대신한 형의 희생을 기리며 마을에선 그를 수호신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말을 마친 후 함은 다시 핸드폰을 둘에게로 내밀었다. 달 사장과 노아는 입을 다문 채 핸드폰의 사진만 들여다보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죠. 사진작가로서 매우 동의해요. 같은 사진을 봐도 무엇을 알고 보는지에 따라 사진이 아주 달리 보이기도 하거든요. 그렇지만 무엇을 알지는 결국 자신의 선택이에요. 어떤 사실을 안다는 것은 거대한 피사체를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아요. 사람들은 잘 찍힌 사진 한 가지를 가지고 피사체를 다 알게 된 듯이 말하지만, 실상 그들이 보는 것은 피사체의 한 면일뿐이에요. 모든 사람이 한 가지 피사체에 대해 같은 사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진이 피사체 전부라고 착각해서는 안 되죠. 내가 만약 학자나 교수였다면 ‘그러니까 최대한 다양한 사진을 수집해서 가장 정확한 대상의 모습을 파악하세요.’라고 했겠죠. 그렇지만 저는 예술가예요. 그러니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겁니다. ‘여러 장의 사진 중 당신이 보고 싶은 사진을 잘 선택하라.’고 말입니다. 아주 편협한 정보일지라도 그 정보를 가지고 대상을 바라봤을 때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렇게 보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나무에서 마을 사람들의 비겁함을 보든, 용감한 누군가의 희생을 보든, 그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함은 한바탕 연설을 쏟아내고 기분 좋은 듯 웃으며 위스키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처음 함을 봤을 때 노아는 그가 모델이 아닐까, 생각했다. 큰 키에 작은 얼굴, 호리호리하지만 꾸준히 관리한 듯 부실해 보이지 않은 몸매, 장발에 큰 눈, 오뚝한 코, 입술 위와 아래턱에 무심한 듯 덥혀있는 수염은 노아가 언젠가 한 번 사진으로만 보고 감탄했던 무명의 배우를 닮았다. 함과 몇 번의 대화를 나눈 후 노아는, 외모에 비하면 아주 겸손한 수준이지만, 그에게 과시적인 면모가 있다고 느꼈다. 그는 자리에 앉으면서 집에 가기까지 거의 끊이지 않고 연달아 담배를 피웠으며, 위스키를 좋아해 안주도 없이 글렌피딕 대여섯 잔을 마셔야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투는 평범했지만 표정과 제스처는 마치 영화배우를 보는 듯 풍부하다고 할까, 다소 과장되어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와 눈빛은 항상 자신감에 차 있었고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사진작가로서 유명해지는 것에 아주 안달이 나 있어서 한 여자를 만나 오랜 사랑을 하거나, 혹은 하룻밤을 보내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노아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함에게는 오직 자신의 예술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노아와 달 사장에게 자신이 찍은 사진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지만, 안타깝게도 둘이 보기엔 차마 예의상 칭찬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노아와 달 사장은 서로만 알 수 있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애써 난감한 기색을 감추었다. 그러나 함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며 노아는 그가 단순히 감각 없는 사진작가이기만 한 것은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피사체의 본모습을 숨기고 싶어 했다. 때로는 그것을 끝까지 숨기기도 했고 때로는 필요한 만큼만 그것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사진작가였지만 선명한 것을 싫어했다. 그가 선명한 사진을 찍을 때는 부업으로 여행자들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어줄 때뿐이었다. 노아에게 있어 함을 사진작가라 부르는 것은 그를 과소평가하는 것이었다. 노아는 그를 예술가라 부르기로 했고 함도 그렇게 불리는 것을 즐겼다. 노아가 보는 한 그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정말로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