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은 하토야. 원한다면 사진을 보여줄 수도 있어. 물론 실제 이름도, 실제 사진도 아니지만.”
“하토? 비둘기라...”
노아는 창에게 돌돌 말린 A3용지 크기의 사진을 펴서 내밀었다. 사진 속엔 흰 원피스에 반팔 카디건을 걸친 수수하게 아름다운 여자 한 명이 수줍게 웃고 있었다.
“영화 포스터야. 하토라는 이름은 영화 속 여주인공의 배역 이름이고. 일본영화거든. 안타깝게도 사진 속 여배우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는 것 같아. 젊은 나이에.”
창은 노아에게 사진을 건네받아, 사진 속 그녀와 인사를 나누듯 한 곳 한 곳 시간 들여 눈길을 주었다.
“혹시 이 영화 본 적이 있어?” 창은 한참이나 그녀와 교감을 나누다 노아에게 물었다.
“아니. 그저 포스터가 마음에 들어서 골랐을 뿐이야.”
“그렇구나. 하토를 만나기 전까진 이 영화 안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창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왜?”
“이 영화 슬픈 영화거든.”
“내용을 알아?”
“응. 고등학교 때인가 본 적이 있어. 하토를 떠올리는데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설마 영화 속 하토란 사람, 안 좋은 결말을 맞는 거야?”
“그건 말해줄 수 없어. 그렇지만 네가 보지 않았으면 해.”
“참나. 이런 얘길 들어버린 이상 하토란 이름을 계속 쓸 순 없잖아.”
“하토란 이름은 그녀에게 잘 어울려.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잖아? 분명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일 거야.” 창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아직 영화를 본 적 없잖아. 그러니까 상관없어. 끝을 본 적 없는 사람이 어떤 끝을 상상하든 그건 자기 마음이지.”
그녀에 대한 칭찬에 노아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 그럼. 언젠간 진짜 하토의 사진을 보여줄게. 진짜 하토의 이름도.”
창은 기분 좋게 웃으며 하토의 사진을 돌려줬다.
“기다릴게.”
둘은 운동장에서 일어나 낮 병원 건물로 향했다.
“일본에 다녀왔어. 2박 3일 일본여행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이 있었거든.” 함은 모자를 벗어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어떠셨어요?”
“다행히 커플이었어. 여자끼리 가는 여행을 따라가면 이래저래 귀찮은 일들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서.” 함은 살짝 인상을 쓰며 계속해서 머리를 만졌다. “게다가 커플 여행객의 니즈를 파악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쉬워. 최대한 커플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스토커처럼 몰래 사진을 찍으면 되는 거지. 같은 장소에서 잘 건진 사진 한두 장만 확보하면 나머진 내 시간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겠군.”
“선명한 사진 찍는 기분은 어때요?” 노아는 함을 놀리듯 말했다.
“사람들이 어떤 사진을 좋아하는지는 알고 있어. 다만 내가 그런 사진을 찍기 싫을 뿐이지.” 함은 정곡을 찔린 듯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부업으로 찍은 사진은 보여주신 적이 한 번도 없네요?”
“그런가? 어렵지 않아. 지금 인터넷에 들어가서 일본 여행사진을 검색해 봐. 내가 찍은 사진들도 그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함은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나 노아는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좋아요. 원래 사람이란 자기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 부분을 초라하게 느끼는 법이죠.”
“너는 한 번씩 애어른 같을 때가 있어. 혹시 책을 좋아하는 거야?”
“최근에 취미를 들였어요.”
“어떤 책을 좋아하는데?”
“가리지 않고 봐요. 최근엔 소설을 봤어요. 일본의 어느 작가가 쓴.”
대답을 들은 함은 피식 웃으며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한잔을 들이켜더니 뭔가 생각난 듯 핸드폰을 꺼냈다.
“이번에 커플 고객을 호텔에 보내고 새벽에 혼자 산책을 하다가 찍은 사진이야.”
함은 노아에게 핸드폰으로 옮겨진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함의 사진치고는 드물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예쁜 사진이었다. 사진은 일본의 고즈넉한 시골 마을을 담고 있었다. 작은 개울 양옆으로 산책로가 있고 개울을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보였다. 그 위로 뜬 커다란 달이 개울에 비쳐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다만 함의 사진이 늘 그렇듯, 사진의 주인공 역할을 하는 피사체는 나뭇잎들에 가려져 모자이크를 해놓은 작품처럼 한 번에 형태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얼핏 보면 동물 같기도, 사람 같기도 했다. 노아는 나뭇잎 사이로 드러난 부분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얼굴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가늘고 아름다운 목이 보였다. 손의 모양은 보이지 않았으나 가는 팔이 가지런히 모여 있어 조신함을 더했다. 돌 위에 걸터앉은 걸까? 묘하게 여성스러움이 느껴졌고, 표정은 나뭇잎에 가려져 있었으나 수줍게 미소를 짓고 있을 것 같았다. 사진을 보던 노아에게 문득 강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녀다! 순간 노아는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분명 하토였다. 이 사진을 보고 누군가를 알아본다는 것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노아는 분명 알아보았다. 내가 늘 기다렸던 그녀가 나와 가까이 연결되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노아는 참을 수 없이 마음이 들떴다.
“이 사람, 대화해 봤어요?” 노아는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서 말했다.
“어? 무슨 소리야?” 함은 평소답지 않은 흥분한 노아의 모습에 당황했다.
“저, 이 여자를 알아요! 아니, 안다고 할 수 없지만. 기다리고 있어요! 혹시 이 여자와 대화해 봤어요?”
“일단 진정해 봐.” 함은 노아를 진정시켰다.
“형, 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어요. 이 사진 속 여자가 내가 기다린 그녀가 확실해요! 알려주세요. 이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있어요?”
“제정신이야? 너 정말...” 함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함은 한참이나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표정은 여전히 매우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함은 결심한 듯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좋아. 네가 뭐라고 부르든. 그렇지만 나도 저 친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 대화를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으니까.”
“그렇군요.” 노아는 매우 실망한 듯 보였다.
“이 정도는 말해줄 수 있겠네. 밤하늘을 매우 좋아하는 듯 보였어. 사진을 찍고 나서도 한참이나 같은 자리에서 위를 올려다보더라.”
“혹시 달을 좋아하는 걸까요?”
“유독 달이 컸던 밤이었으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네.”
“달을 좋아하는 사람이군요.”
“네가 뭐라 부르든.”
내가 주말마다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하토를 만났다. 이 사실만으로도 노아는 하토와 한걸음 가까워진 것을 느꼈다. 하토는 달을 좋아한다. 노아는 하토에 관한 조각을 모으듯 그녀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기억해 두었다. 하토는 달을 좋아한다. 그녀는 일본 어느 마을에서 한참이나 혼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