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by 가로등 책방

병원 복도를 지날 때, 노아는 결국 꺼져버린 전등을 발견했다. 창이 없는 낮 병원은 생각보다 더욱 어두웠다. 주중에 병원을 오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노아는 병원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노아는 원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원장님, 작별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노아. 어서 들어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퇴근 시간임에도 원장은 흐트러짐 없는 복장으로 구두를 신고 문을 열어주었다.

노아는 안으로 들어가 말없이 문 앞에 서있었다.

“여기 앉아요. 뭐 좀 마실래요?”

“아 저는 괜찮습니다.”

노아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놓인 소파에 앉으며 대답했다. 원장은 노아의 대답과 상관없이 컵에 티백을 하나 담아 뜨거운 물을 부었다.

“자 뜨거우니 천천히 마셔요.”

“네 감사합니다.”

원장은 노아의 맞은편 소파에 앉은 채 별다른 말도 없이 노아를 바라보았다. 노아는 원장의 눈빛에 못 이겨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제야 원장은 입을 열었다.

“오늘로 봉사활동을 그만둔다고 들었어요.”

“네 이제 주말엔 제 시간을 좀 가지려고요.”

“그래요. 젊은 사람이 1년 가까이 이렇게 매주 봉사해 준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에요. 고맙게 생각해요.”

노아는 멋쩍게 웃었다. 원장은 노아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만두는 이유에 아마 창도 관련이 있겠죠?”

노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창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노아의 마음이 다시 아려오기 시작했다.

“저도 매우 마음이 아픕니다. 그렇게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 이렇게 안타깝게 가다니요.” 원장님은 시간을 둔 후 말을 이었다. “애석하게도 저는 마냥 슬퍼하고 있을 수만도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낮 병원에 등록된 환자가 죽었으니 원장인 내가 이런저런 서류를 작성해야 하거든요.”

노아는 원장의 슬픔마저도 묘하게 기계적으로 느껴졌다. 테이블 위엔 창과 관련된 서류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원장님.”

“네 말씀하세요.”

“혹시 창의 죽음에 관해서 제가 좀 알 수 있을까요? 낮 병원 규칙상 모른 척해야 하지만 창과 나는 친구였습니다. 친구가 죽었는데 어떻게 죽었는지 조차 알 수 없다니요.” 노아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원장은 휴지를 한 장 뽑아서 노아에게 건넸다.

“노아. 창과 노아가 가깝게 지냈다는 것은 파악하고 있어요. 하지만 병원의 방침 상, 이곳은 외부와 철저하게 구별된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 낮 병원은 환자들을 사회로 복귀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누구에게나 호의적이고 관대한 특별한 사회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외부의 사회와 연결고리가 생기게 되면 특별한 사회는 그 특별함을 잃고 말아요. 병원 내의 관계는 병원 안에서만 유효하다는 항목에 창은 동의를 하고 입원을 했어요. 노아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창은 노아와의 관계를 병원 밖으로 가져갈 생각이 없었을 겁니다.”

순간 노아에게 억울하면서도 슬픈 감정이 견딜 수 없이 차올랐다. 둘이 특별한 관계였음을 호소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노아. 오늘 내가 노아를 부른 건 그동안 창과 나눈 대화 중 내가 모르는 내용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에요. 혹시 창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아 잠시만.” 원장은 울려대는 핸드폰을 확인하고 양해를 구하더니 전화를 받기 위해 복도로 나갔다.

노아는 홀로 방안에 남겨졌다. ‘창은 노아와의 관계를 병원 밖으로 가져갈 생각이 없었을 겁니다.’라는 원장의 말이 노아의 귀에 맴돌았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떤 식으로든 노아는 둘의 특별한 관계를 증명하고 싶었다. 노아는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위의 창과 관련된 서류를 빠짐없이 챙겨 들었다. 원장의 통화소리가 원장실 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렸다. 노아는 두 팔 가득 서류뭉치를 들고 원장실 문 앞에 섰다. 문 밖에서 원장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기계적 스타카토로 하 하 하, 순간 노아는 문을 열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뒤늦게 노아를 발견한 원장이 뒤쪽에서 소리를 지르며 뒤쫓았다. 병원 밖으로 나온 노아는 도로를 가로질러 달렸다. 양옆에서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들리고 아마도 원장의 고함소리가 들렸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노아는 자신의 뒤를 쫓던 경적소리가 잠잠해졌음을 깨달았다. 노아는 숨을 헐떡이며 사방을 살펴 보통이라면 들어가지 않았을 것 같은 허름한 커피숍에 들어갔다. 카운터 안쪽 구석진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다 깬 주인 할머니는 양팔 가득 서류 뭉치를 들고 숨을 헐떡이는 노아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노아는 대충 눈에 보이는 아무 차나 주문 한 뒤, 창문이 없고 칸이 나누어진 구석자리에 몸을 쑤셔 넣었다. 노아는 창에 관한 서류를 테이블 위에 쏟아부었다. 순서를 알 수 없이 각종 서류들이 난잡하게 섞여 있었다. 서류마다 ‘한소경’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아마도 창의 본명일 것이라 노아는 생각했다. ‘창은 노아와의 관계를 병원 밖으로 가져갈 생각이 없었을 겁니다.’ 노아는 인상을 쓰며 서류를 손에 잡히는 데로 읽어보기로 했다.

입원기록지,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한 2년쯤 전. 병동은 폐쇄병동, 주소는 자살 시도. 그 아래로 영어로 추측되는 꼬부랑글씨들... 그 뒤로는 각종 동의서들이 스테이플도 없이 한 장씩 떨어져 있었다. 그 밖에 처방기록, 간호기록지 등등 알아보기 힘든 서류들이 꽤 두껍게 쌓여있었다. 노아는 인내심을 가지고 ‘한소경’에 관한 서류를 한 장 한 장 살펴보았다. 혹시나 창에 관한 어떤 정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전문 지식이 없는 노아로서는 진단명이 쓰인 곳조차 알아낼 수 없었다. 노아의 인내심이 점차 떨어져 갈 즈음 카운터에서 만난 주인 할머니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총각 차 나왔어요.”

노아는 화들짝 놀라며 양손으로 서류들을 급히 한쪽으로 모아 쟁반 놓을 자리를 만들었다. 할머니는 의심 어린 눈으로 노아를 바라보다가 쟁반을 놓고 사라졌다. 쟁반 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란 꽃이 담긴 차가 모락모락 김을 내며 놓여있었다. 따뜻한 증기와 함께 은은한 케모마일 향이 노아의 놀란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노아가 잠시 차를 바라보다가 다시 서류더미에 눈을 던졌을 때 마음대로 뒤섞인 서류들 사이로 면담기록지라 쓰인 서류철이 보였다. 노아는 서류들 속에서 면담기록지를 꺼내 살펴보았다. 약 50장쯤 되어 보이는 면담기록지에는 장마다 의사의 물음과 ‘한소경’의 대답이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노아는 ‘이거라면 창에 관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노아는 면담기록지의 첫 장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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