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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일춘 Oct 21. 2021

그 꽃을 만났다

 

황금산에 입산(入山)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법정 스님은 등산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셨다. 입산, 산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산에 오른다는 말을 감히 하지 않으셨다. 산을 정상에 오르기 위한 목표물로써 보신 게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로 보셨기에 그리하셨다. 나도 법정 스님의 그 마음씀을 조심스럽게 뒤따라본다). 입산 이유는 심플했다. 코로나19 덕분에 나는 ‘확찐자’가 되었고 둥덩산 같은 배를 주체하기 어려워졌다. 적정 몸무게도 훌쩍 넘겼다.     

 

사실 나름 참을만했다. 일정 부분 적응도 돼가고 있었다. 하지만 즐겨 입던 청바지를 단추도 채우지 못하고 허리띠로 졸라매고 입게 된 건 참을 수 없었다. 나를 스타일리시하고 요요한 몸매로 만들어주는 이 청바지를 더 이상 입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들었다. 결국 나는 입산을 결정했다.    

 

처음 이틀은 청바지 생각에 집을 나섰다. 입산을 시작하고 3일째 되던 날, 그냥 새 청바지를 구입해 입을까 하는 생각이 꾸물꾸물 올라오기 시작했다. 생각이 저항하기 시작하니 몸이 편해지기를 갈구한다. 마침 TV에서는 찹쌀 탕수육이 맛있기로 소문만 맛집의 사연이 송출되고 있다. 평소 맛집 탐방을 즐겨보는 나로서 이 방송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청바지 생각이 교차했다.      


교차하는 생각 사이 ‘저항하는 뇌가 도와주는 뇌로 바뀌는 데 대개 20여 일이 걸린다.’고 했던 글귀가 떠올랐다. 3주 동안만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면 뇌가 그 행동을 도와준다는 경이로운 이야기가. 더 이상 침대에 누워있을 이유를 찾을 수 없다. 현관문을 박차고 1시간 넘게 황금산을 거닐었다. 그날 저녁 1시간여의 산행 중, 가장 먼 구간은 침대에서 현관문까지의 거리였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퇴근 후에 입산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얼핏 저 멀리 도탑은 햇살을 머금은 하얀 점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못 보던 건데, 뭐지?’ 궁금해 황급히 다가가니 가시덤불 그늘 아래 하얗게 핀 꽃이다. 하얀 꽃이 다다귀다다귀 붙어있다.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꽃잎이 다섯 개, 중간에 실팍한 꽃술이 수십 개다. 하얀 꽃잎에 노란 꽃술이 더하니 샛말갛다. 소박하지만 진한 향기도 코를 자극해온다. 으스름 황혼 속에 더한층 강렬한 향내를 풍긴다. 차분하면서도 화려한 꽃향기에 나도 모르게 취한다.   

   

‘무슨 꽃이지?’ 나는 지딱지짝 다음에서 ‘꽃 검색’을 했다. 꽃의 정면을 크게 촬영하면 바로 무슨 꽃인지 알려주니 참 유용한 기능이다. 검색 결과, 찔레꽃이란다. 이름을 알게 되니 조금 더 정이 간다. 새로 사귄 친구의 이야기가 궁금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런저런 얘기 나누듯 한참을 들여다봤다. 재재재재 사이사이 꽃내음도 맡는다. 이 조우(遭遇)에 하루의 수고로움을 토닥토닥 위로받는다. 겉모습보다 내면의 향기가 진한 사람에게 끌리듯 나는 이 찔레꽃에 홀딱 반해버렸다.     


'왜 그동안 눈에 띄지 않았을까?' 지난 한 달 동안 지나다녔는데, 오늘에서야 이 꽃을 만났다. 찔레꽃을 만났다. 고은 시인이 '그 꽃'을 만났을 때 느꼈을 마음의 결을 나도 오롯이 만난다. 도탑은 봄 햇살이 더하니 고즈넉한 황금산이 송두리째 담긴다.


그 꽃 /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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