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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일춘 Oct 22. 2021

256가닥의 착한 추억


수타 짜장면 어때?” 



한 동료가 최근 타 부서 동료에게 맛집 추천을 받았다며 사전에 검색해 놓은 블로그를 들이민다. 오늘 점심으로 딱이다. 메뉴가 결정되자 4명이 일사불란하게 한차에 올라타 맛집으로 향한다. 1시간밖에 안 되는 점심시간인지라 미리 주문을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짜장면 2, 짬뽕 2에 탕수육 중자 하나요.”      


중국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각자 맛봤던 수타면에 대한 예찬이 이어진다. ‘기계면은 따라올 수 없는 쫄깃쫄깃한 면발’, ‘짜장면에 깃든 손맛’, ‘맛과 건강을 한 번에 다 잡을 수 있다’ 등등          




내 어린 시절, 짜장면은 지금처럼 쉽고 간편하게 한 끼 때울 양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이 아니었다.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었던 귀한 음식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상을 타 온 날, 비 오는 날 할아버지가 나를 마중 오셨던 날에나 그 귀한 형상을 영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온 가족이 다 외식을 하는 게 아니었다. 상을 타 온 날이면 할아버지가 동생들 몰래 나만 살짝 불러내셨다. 그러면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조심 할아버지를 따라나섰다. 그래도 비 오는 날 할아버지가 마중 오셨을 때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하교 길에 할아버지와 단 둘이 떳떳하게 중국집에 입성했다.    


집 주변에 중국집이 2~3곳 있었지만 집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한 중국집을 단골로 갔다. 혹시 모를 동생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한 안전거리 확보가 이유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집 사장님과 할아버지가 친분이 있으셨다. 그 친분을 밑천 삼아 때때로 돈이 없을 때는 외상도 더러 하셨던 거 같다.      


주렴(珠簾)을 들추고 들어서면 짜장 볶는 냄새가 진하게 우리를 반겼다. 천상의 달짝지근한 냄새에 취해 들어서자마자 군침이 사르르 돈다. 할아버지는 주인아저씨가 물어오지도 않은 방문 이유를 늘어놓으며 거들먹거리면서 짜장면 한 그릇을 주문하셨다. “우리 장손이 이번에 또 상을 탔지 뭐야. 내 어디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짜장면이라도 한 그릇 사 먹여야지. 허허허!”  “어이고, 그래요! 그럼, 오늘 군만두는 서비스!” 넉살스러운 주인장의 맞장구에 할아버지는 어깨에 힘이 더 들어가는 거 같았다.    


주문과 동시에 주방장이 팔을 걷어 올리고 밀가루 반죽 양끝을 잡고 길게 늘여 널찍한 목판에 내리친다. 내리쳤던 반죽을 길게 늘이고 다시 목판에 내리치기를 수십 차례. 밀가루 반죽을 목판에 탕탕 내리치고 늘리면 면발이 길게 쭉쭉 늘어났다. 접고, 늘이기를 또 몇 차례. 한 가닥이던 면발이 순식간에 수십 가닥으로 늘어나는 게 꽤나 장관이었다. 지금은 편의성 때문에 대부분 기계로 면을 뽑으니 그 장면은 역사가 된 지 오래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진기한 마술쇼에 나도 모르게 허기가 차올랐다. 엽차 한 모금과 단무지 한 조각을 춘장에 찍어 우물우물 씹으며 허기를 애써 달랬다. 애타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짜장면이 상에 오르기가 무섭게 나는 “할아버지, 빨리빨리!”를 외쳤다. 할아버지에게 빨리 비벼 달라고 재촉했다.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비벼질 때마다 달콤하고 짭짤한 짜장 내음이 김과 함께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짜장에서 느껴지는 강한 불 맛, 수타면의 쫄깃쫄깃함, 고명으로 올린 채 썬 오이, 삶은 계란 반쪽과 완두콩 몇 알.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나는 짜장면 한 그릇을 아귀아귀 먹어치웠고 입가에 묻은 까만 짜장도 아까워 혀로 핥아먹었다. 그런 나를 할아버지는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찧고 까불던 어린 시절, 짜장면 한 그릇은 성장의 보상이었고 할아버지와의 달콤한 추억이다. 상을 탔다는 우쭐거림과 빗줄기의 시원함, 포만감이 한데 어우러져 세상을 다 가진듯했다. 입 안 가득 살캉거리던 부드러우면서도 차진 식감과 살가운 풍경. 짜장면은 내게 그런 기억이고, 추억이다.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어느새 중국집이다. 미리 주문한 덕에 바로 한상 차려졌다. 얼마 만에 맛보는 수타 짜장면인가? 까다로운 힘 조절이 들어간 탓에 면은 가늘고 곱다. 주방장의 대단한 공력이 엿보인다. 부드러우면서도 차진 식감이 무뎌진 미각을 자극한다. 한입에 모아 단숨에 후루룩후루룩 짜장면 한 그릇을 비워냈다. 비워지는 그릇에 반비례하게 허기진 마음이 채워진다. 나는 유년시절의 추억이 방울방울 떠올라 입안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듯 수다를 떨었다. 짜장면 한 그릇에 어느새 화기애애하다. 짜장면은 음식 이상의 그 무엇이다.     




얼마 전, 경북 청송 시골마을에서 수타 짜장면집을 운영하는 노부부의 영상을 만났다. 노포 (老鋪)에 테이블은 5~6개 정도다. 허름한 가게와 늙수그레한 노부부의 모습에서 세월을 느낄 수 있다. 주문과 동시에 수타로 면을 뽑는다. 어릴 적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그 모습이 재현된다. 밀가루 반죽을 목판에 탕탕 내리치고 늘리기를 반복하니 256가닥이다. 가늘고 고운 면의 자태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감탄과 함께 입 안 가득 추억이 고인다. 짜장면 값 17원 하던 시절부터 45년간 만들어 오셨다고 하니 그 맛이야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 코로나19가 좀 잠잠해지면 착한 짜장면을 만나러 갈 테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곱씹으러.          



최영철 / 인연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고

자장면 집 한 켠에서 짬뽕을 먹는 남녀

해물 건더기가 나오자 서로 건져주며

웃는다 옆에서 앵앵거리는 아이의 입에도

한 젓가락 넣어주었다

면을 훔쳐 올리는 솜씨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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